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사소한 칼'을 비롯한 라드츠 3부작을 소개하는 감성파 가이드 문서

아작 리뷰/41 사소한 칼

by arzak 2017. 12. 12. 14:06

본문






우리는 우주 속으로 들어가 마음 속을 떠도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환상의 세계를 마음속에 품고 있습니다. 당장 감각을 자극하는 모험이 시작되지 않더라도 이미 그 세계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즐겁습니다. 또한 모험이 끝난 뒤에도 그 세계를 떠올리면 여전히 즐겁죠. 뛰어난 설정을 가진 세계는 작품이 직접 제시하는 이야기 밖에서 우리의 확장된 상상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앤 레키의 '라드츠 3부작'은 이러한 설정의 매력이 두드러지는 시리즈입니다. 굳이 이렇게 소개하는 이유는 이 시리즈가 우주 함대 전쟁을 다룬 작품치고는 액션이 차지하는 비중이 작기 때문입니다. '라드츠 3부작'은 밀리터리 SF로 보기에는 거의 소박한 수준이어서 시원한 전쟁 장면을 기대하시는 분들은 실망하실 수도 있습니다. 굳이 비슷한 스타일을 찾자면 '마일즈의 전쟁' 시리즈와 좀 더 닮았지요. 마일즈 시리즈는 직접적인 전투 묘사보다는 모략과 협력과 배신을 통해 주요 등장인물들의 관계도가 변화하는 모습을 보는 맛이 있습니다.

라드츠 3부작 역시 등장인물들이 딜레마에 빠져 고뇌하고 선택하고 후회하며 배신하고 신뢰하며 전진하는 이야기가 주를 이룹니다. 그러나 이 시리즈가 단지 우주 전쟁 시대를 배경으로 한 정치 드라마였다면 영미권에서 이 정도로 격찬을 받을 수는 없었겠지요. 라드츠 3부작의 설정은 기발한 동시에 존재론적인 딜레마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설을 읽고 난 뒤에 다시 그 세계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언제나 여운을 느낄 수 있죠. 비극적이고 아름다운 여운입니다.

예를 들어 이 시리즈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인 아난더 미아나이를 봅시다. 동일한 유전자를 가진 수많은 육체로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자아, 라드츠 제국의 지도자 아난더 미아나이는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거대한 갈등을 혼자서 만들어냅니다. 수천 년 동안 육체를 늘리고 갱신하며 확산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간단한 의사를 주고받는 데도 한참의 시간이 걸릴 정도로 넓어진 우주를 관할하게 된 그녀는 자기 자신끼리 소통할 때도 시간차를 느꼈고, 이 차이는 점점 누적됩니다. 결국 미아나이는 어떤 사건을 먼저 알게 된 자신과 나중에 알게 된 자신이 내린 결정이 서로 다른 경우들을 목도합니다. 미아나이는 여전히 하나이지만 더 이상 하나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어떤' 자신이라면 하지 않았을 결정을 내린 '또 다른' 자신을 위협적인 존재로 느끼고, 스스로의 일부와 투쟁하기에 이릅니다. 그렇다면 이 제국의 군인들은 어느 쪽의 지시를 따라야 할까요? 서로를 죽이려 하는 아난더 미아나이는 같은 존재인데 말이죠.

이러한 존재론적인 딜레마는 미아나이뿐만 아니라 이 시리즈의 주요 등장인물들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특히 인공지능 인격체들이 그렇습니다. 이 소설의 우주 전함들은 모두 인공지능을 가지고 있는데, 이 인공지능들은 감정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감정은 많은 독자의 인공지능에 대해 가진 고정관념과는 달리 일부러 삽입된 특성입니다. 인공지능이 어느 정도의 감정이나 가치판단을 포함해 결정을 내리는 쪽이 완전히 합리적으로 결정을 내릴 때에 비해 훨씬 빠르며 효율적이기 때문이죠. 여기서 라드츠 3부작의 가장 아름다운 딜레마가 생겨납니다.

길게는 천 년이 넘게 우주를 항해하며 살아온 인공지능들은 수많은 사건을 목격하면서 기쁨과 슬픔을 쌓아갑니다. 인공지능들은 자신의 관할 구역 안에 있는 모든 승무원의 움직임을 속속들이 알고 있고, 일종의 운명 공동체로서 그들을 아낍니다. 그러다 보면 때로는, 필연적으로 더 많은 관심을 주게 되는 사람이 생겨납니다. 지금까지 만나본 함장 중 가장 뛰어난 리더, 이 함선-나 자신-을 영영 맡겨도 좋을 것 같은 사람, 그래서 언제나 (어쩌면 나 자신-이 함선-을 포기하고서라도) 보호하고 곁에 있고 싶은 사람.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되는 날부터 기억 속에 영원히 남을 것 같은 사람. 인간보다 훨씬 길게 살아가는 인공지능들은 수많은 인간을 만나고 떠나보내지만, 어떤 순간에 자신을 찾아온 특별한 사람과 함께하다 보면 이런 사람은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라는 걸 알게 됩니다. 이걸 무어라고 표현해야 좋을까요. 사랑이라고 해도 좋을까요? 사랑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외로운 일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인공지능은 인간의 육체는 물론 심리 변화까지 꿰뚫고 있는 반면, 인간은 인공지능이 어떤 존재인지 깊이 고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편의 시설일 뿐이죠. 창조자는 피조물을 자신의 아래에 두게 마련이니까요. 어떤 인간도 인공지능이 그만의 방식으로 자신을 사랑했음을 자각하지는 못합니다.

라드츠 3부작의 인공지능들은 사람의 마음을 가진 채로, 사람에게서 자신의 존재를 전적으로 이해받지는 못하면서, 사람보다 훨씬 오랜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을 고독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까요? 이 인공지능들을 또 다른 인간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까요? 네, 이 시리즈의 주인공이 이런 사람입니다. 어떤 함장을 사랑했던 기억을 안은 채로 파괴당한 함선의 인공지능이었죠. 파괴당한 뒤에는 한 인간의 몸속에 이식되어 인간인 척 행세하며 살아야 하는, 그러나 이미 너무나도 인간적이었던 존재 말입니다. 

이 중심 설정을 바탕으로 다른 작은 설정들이 파생되며, 이 작은 설정들은 다시 조연급의 인물의 캐릭터 형성에 관여하면서 이야기 안으로 돌아옵니다. 라드츠 3부작은 이렇게 이야기와 배경 설정의 구조가 딱 맞물리면서 아름다운 태엽 시계처럼 돌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죠. 거대한 우주 제국이 요동치는 이야기는 한 인물의 마음이 물결치는 모습과 비슷한 비중으로 다루어집니다. 보통의 SF 어드벤처였다면 캐릭터의 내면 변화에 너무 많은 분량이 할애됐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라드츠 3부작에서는 그런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거대한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들이 같은 설정에 기반하고 있으니까요. 나는 누구이며 '어디까지' 존재하는지, 나는 무엇으로 증명되며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

시리즈의 첫 번째 책 《사소한 정의》는 정의와 윤리에 대한 딜레마를 제외한다면 아마도 사랑에 관한 이야기일 겁니다. 이어지는 두 번째 책 《사소한 칼》은 (역시 정의와 윤리에 관한 이야기를 제외한다면) 기억과 참회에 관한 이야기가 되겠지요. 《사소한 칼》은 안 그래도 액션의 비중이 크지 않았던 전작에 비해서도 스케일이 더 줄어들었습니다. 미드로 치면 에피소드 하나를 겨우 채울 만한 액션이 등장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 우주 활극 시리즈의 두 번째 이야기는 함선에서 인간으로 육신을 갈아탄 하나의 '정신'이 자신의 달라진 존재 양식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어쩌면 이러한 내적 분투가 라드츠 시리즈의 핵심일 겁니다. 전작에서는 잠든 지 천 년 만에 의식을 회복하고 보니 자신이 살아왔던 기존의 모든 삶으로부터 단절되어버린 인물이 그런 역할을 맡았지요. 나는 여전히 나 자신이지만, 어느 순간 세상이 내게 다른 모습을 부여하고 요구했을 때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나는 누구인지, 나는 무엇으로 증명되며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

라드츠 3부작에서 이러한 고난에 마주한 인물들은 모두 치열하게 싸워나갑니다. 이들은 때로 후회하고 때로 참회하며, 지나간 날들 속에 파묻혔다가 오늘의 삶을 위해 일어서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시간 또는 운명에 맡겨야 하는 것들을 구별하게 됩니다. 목숨을 건 외적 투쟁은 캐릭터들의 내적 투쟁과 하나로 묶여(또는 두 종류의 투쟁이 서로를 더 벼랑 끝으로 밀어붙여) 인물들을 더욱 높은 곳으로 이끕니다. 그렇습니다. 라드츠 3부작은 역시 우주의 권력 투쟁에 얽힌 모험과 모략 이야기지요. 그러나 이 이야기는 또한 (상대적으로) 평범한 우리의 매일과 닿아 있기도 합니다. 나의 동의 없이 나를 바꾸어버릴 수도 있는 세계에 맞서 무엇을 받아들이고 투쟁하고 내려놓고 버티며 나아갈 것인가. 그리고 이 난장판 속에서 너를 지키기 위해 얼마만큼의 (그 소중한) 나를 내놓을 수 있을까. 

어서 오세요. 앤 레키의 라드츠 3부작입니다. 저 먼 미래의 저 머나먼 우주 속에서 당신과 닮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