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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SF 완전사회. 13] 우리는 어떤 자취를 남기게 될까 by 박해울

아작 미디어

by arzak 2021. 2. 19.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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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자취를 남기게 될까

타탸나 루바쇼바 글, 인드르지흐 야니체크 그림, ROBOT

 

 

2021년이 밝자마자 매서운 추위가 기승을 부렸다. ‘작년 겨울엔 그리 춥지 않았는데, 올해 추위는 작년 몫이 합산된 건가?’라고 가볍게 여겼다가 기후변화에 대해 찾아보게 되면서 예삿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지구가 뜨거워지면서 북극의 찬 공기를 막아주던 제트기류가 약해지는 바람에 한반도에 한파가 몰아닥쳤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작년 여름엔 50일이 넘는 장마가 있었고, 겨울은 너무 따뜻했다. 재작년 여름은 더워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것뿐인가. 전 지구적 전염병 사태는 아직도 안 끝났다.

 

나는 이번 겨울이 생애 첫 겨울인 아이들은 이 날씨를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들은 외출할 때에는 마스크 착용이 당연한 규칙으로 받아들여지는 첫 세대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자 이내 우울해졌다. 세계는 변화하고, 우리는 이렇게 인간의 종말을 향해 달려간다.

 

유년기에는 인류의 종말은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생길 거라고 상상했다. 세계 대전이 발발해서 핵폭탄이 폭발하거나, 소행성 충돌로 지구가 산산이 조각나거나, 고도로 발달한 인공지능이 인류에게 반란을 일으키는 일 따위였다. 멸망은 아주 먼일이고, 적어도 내 생전에는 오지 않을 거라는 안일한 무의식에 따라 상상한 이미지다. 어디선가 본 재난 영화와 소설을 뒤섞어 막연히 떠올린 시나리오 같다. 하지만 이것은 머나먼 후손 시대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내 이야기였다.

 

 

*

 

SF는 현재에서 시간이 흐른 미래를 다루는 경우가 많다. 장르 특성상 SF는 새로운 과학 기술이 인류 앞에 나타났을 때, 세상이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그 초점을 둔다. 무언가의 발명이나 발견으로 세상은 좋은 쪽이나 나쁜 쪽으로 변화할 수 있다. 그렇기에 SF에서는 인류 멸망 혹은 멸망 이후의 세계에 대해 그리는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나 SF는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 만화, 게임 등 시각적인 매체와 합쳐지면 시너지를 낸다. 새로운 설정이나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아이템을 장황한 설명 없이 바로 독자들에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타탸나 루바쇼바가 글을 쓰고, 인드르지흐 야니체크가 그린 체코의 그래픽노블 ROBOT은 인류 멸망 이후의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이 이야기는 아주 오래전 사라진 인류의 자취와 로봇의 기원을 찾는 로봇 윌리엄과 메리웨더의 모험을 그리고 있다.

 

그들은 로봇 공동체의 일원으로 이 모든 것은 언제 어디에서 시작했나? 우리의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처음으로 원래 살던 벽 안쪽에서 벽 너머로 탐사를 떠난다.

 

그들은 바깥 풍경을 보고 탄성을 내지르며, 생사의 고비도 여러 번 넘긴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구조물이나 자연환경 앞에서 추락하기도 하고, 다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모험을 멈추고 되돌아가지 않는다. 독자는 그들의 탐사 기록을 읽으며 이 세계에 대해 점차 알아가다가 마지막 도착지에 이르면 이 세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깨닫게 된다. 이 장면에 이르면 왜 ROBOT이 그래픽노블로서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지 수긍할 수밖에 없다.. 이 책에서 그림은 세계를 이해하는 데 빠질 수 없는 부분이다.

 

이 이야기에서 로봇은 자신의 조상을 만든 이들이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역사의 단절로 인해 로봇들은 자신이 관찰하고 수집한 표본을 토대로 과거에 대해 억측만 할 뿐이다.

 

모험은 유쾌하게 그려지나 독자들은 마냥 유쾌하게만 볼 수 없다. 그들이 딛고 서 있는 땅은 한때 인류가 번성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ROBOT에서 제시한 로봇의 설정이나, 공동체에 대한 설정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로봇과 마주했던 옛 인류 문명이 남긴 흔적이다. 독자는 낯익은 시설, 익숙한 구조물, 풍경과 문구들을 볼 수 있다. 굳이 설명이나 묘사, 대사로 언급하지 않아도 바로 알아챌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로봇에게는 아주 오래전 부흥했던 문명의 흔적일 뿐이다. 로봇들은 인간의 두개골을 보고 알 수 없는 목적의 타원체라고 하고, 거미를 보고 섬유를 생성하는 표본이라고 이름 붙인다. 확장자 ‘DOC’‘PDF’를 문서를 작성한 저자의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 형상의 마네킹을 보고는 그것이 로봇의 조상이라고 여긴다.

 

로봇들이 수집하는 표본을 보면서 현실에서도 인류 문명이 멸망하면 무엇이 남겨지게 될까 궁금해졌다. 내가 죽고, 내가 알던 자들이 모두 떠나고, 결국 인류가 멸망했을 때, 새롭게 나타난 존재가 우리에 대해 알아가려고 할 때 제일 먼저 무엇이 발견될까?

 

나는 그것이 무엇이든 좋으니 인류 문명의 잔재를 발견한 존재에게 해가 되지 않은 것이었으면 좋겠다. 그저 거대한 세계의 작은 일부인 우리가 이 행성을 완전히 못 쓰게 만들지만 않았으면 한다. 인간이 세운 문명이 세계를 파괴하면서까지 계승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얼마 전에 인류가 지금까지 생산한 인공물의 총 질량이 지구 위 생물의 총질량을 처음으로 넘어섰다는 뉴스 기사를 보았다. 나는 인간들이 모여 행성 위에서 유의미한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그 자취를 남길 수 있다는 것에 매번 놀라움을 느낀다. 몹시 두렵고 서글픈 일이다.

 

책 속, 윌리엄과 메리웨더가 마주한 벽 너머의 자연 풍경은 아름다웠다. 이 풍경은 대사나 부연 설명 없이 몇 장에 걸쳐 제시된다. 그들이 걸어가는 사막과 대초원, 울창한 숲은 여전히 생기있고 울창하다. 나무는 굵은 뿌리를 내리고 풀은 싱그럽게 자란다. 문명의 흔적이 아무것도 남지 않더라도, 미래의 풍경이 실제로도 그렇기를 바란다.

 

 

 

 

 

 

박해울, 소설가

 

단국대학교에서 문예창작 학사와 석사를 전공하였다. 대학 재학 중인 2012년에 <계간문예> 소설부문 신인상을 수상하였으며, 기파 2018년 제3회 과학문학상 장편소설 부문 대상을 수상하였다. 누전차단기와 PE 밸브를 만드는 회사에서 일했으며, 현재는 사회복지사로 활동하고 있다. 캐릭터와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따라가며 즐길 수 있으면서도, 책장을 덮고 나면 현실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는 글을 쓰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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