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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혜 『궤도의 밖에서, 나의 룸메이트에게』 리뷰: 태초에 이별이 있었다 by decomma 누군가 사랑이 먼저일까 이별이 먼저일까를 묻는다면 무슨 귀신 싸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웃을지 모르겠지만 태초에는, 분명 사랑보다 이별이 먼저 존재한 것 같다. 전삼혜 연작소설집 『궤도의 밖에서, 나의 룸메이트에게』를 관통하는 하나의 문장을 고르라면 단연코 나는 이 문장을 택하고 싶다. “태초에 빅뱅이 있었고 다음 순간 모든 것이 서로 멀어졌다.” 무릇 진정한 사랑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그리고 그 세계는 바로 이별의 세계다. 연작소설 혹은 장편소설로 확장되기 전, 전삼혜가 단편 「창세기」를 통해 선보인 제네시스의 세계 역시 사랑보다 이별이 앞선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다시 엮인 등장인물들의 연대기는 그 자체로 장대한 이별 연습에 가깝다. 『궤도의 밖에서, 나의 룸메이트에게』는 ‘문라..
전혜진 소설집 <아틀란티스 소녀> 리뷰: "우리에게 너무하는 세상에서" by 박문영 우리에게 너무하는 세상에서 는 윌리엄 워즈워스의 짧은 시다. 시의 제목이자 첫 구절인 ‘The World Is Too Much with Us’는 보통 이렇게 번역된다. ‘세상은 우리에게 너무하다.’ 사람들이 잘 택하지 않는 직역과 의역도 있다. ‘세상은 우리에게 너무 많다.’ ‘세상은 우리에게 벅차다.’ ‘우리는 속세에 과하게 파묻혀 있다.’ 갖가지 맥락의 문장들을 모아보면 어쩐지 의 세계가 떠오른다. 과거가 현재를 뒤덮은, 더는 뭘 만들어 낼 필요가 없는 곳 말이다. 힘도 마음도 조화도 잃어 무엇에도 감동하지 못하는 인류를 씁쓸히 바라보는 워즈워스, 1770년생 영국 시인이 느낀 괴리에는 묘하게도 SF적인 순간이 있다. * 전혜진이 그리는 세상도 “보드라운 퇴보와 멸망”()이 가득하다. 그곳도 이곳처럼..
“떠내려가지 않는 것이 고작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아틀란티스 소녀> 작가의 말 by 전혜진 “떠내려가지 않는 것이 고작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작가의 말을 쓰면서야 생각이 났는데, 이 책은 첫 단편집을 내고 8년 만에 내는 단편집이다. 작가로서 글을 써 온 기간에 비하면 단편을 많이 쓰지 않았던 것인가 싶다가도, 그동안 앤솔러지며 청탁이며 이런저런 일들로 써 온 단편들을 헤아려보니 그렇지만도 않았다. 역시 내가 게으른 탓이었나, 다시 생각해본다. 은 인간이 언젠가 본격적으로 의체를 쓰게 되면 우리가 이 의체를 어떻게 존중해야 하는지, 인간의 모습을 한 의체와 그렇지 않은 의체에 대해서는 어떨지에 대해 생각하다가 쓰게 되었다. 비인간형 의체가 하필이면 토끼 형태가 된 것은, 과학소설작가연대 2기 운영진의 프로필 사진 때문이었다. 2기 대표님인 듀나 작가님을 대신해 그 자리에 앉아 있던 토끼 인형을 ..
"다양한 여성들의 빛나는 서사" 한국 페미니즘 SF의 기수, 전혜진 소설집 《아틀란티스 소녀》 출간! “다양한 여성들의 빛나는 서사” 한국 페미니즘 SF의 기수, 전혜진이 그리는 보드라운 퇴보와 멸망! 무례하고 폭력적인 세상을 전복시키는 우아한 다정함! 세계 최다 발행 SF 잡지 《科幻世界》 글로벌 공모전 수상작가 전혜진의 첫 SF 소설집! 수많은 작가들이 수많은 책을 쓴다.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20년 동안 기다려 왔으나 아무도 써주지 않은” 책들을 전혜진 작가는 근래 왕성하게 발표해 왔다. 한반도 전체가 거대한 ‘노 키즈 존’임을 통렬히 비판한 장편소설 《280일: 누가 임신을 아름답다 했던가》(구픽, 2019)를 통해 “대한민국에서 일하는 임산부로 산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가 하면, 30년간 읽어온 한국 SF 순정만화를 재조명한 에세이 《순정만화에서 SF의 계보를 찾다》(구픽, 2020..
배지훈 장편소설 <아마벨> 리뷰: 전설의 귀환, 한국 하드 SF의 계보를 잇는다 by decomma 전설의 귀환, 한국 하드 SF의 계보를 잇는다. “까마귀 프로필 사진을 사용하는 모 님” 얼마 전 리디북스에 발표된 전삼혜 작가의 단편 를 읽다가 웃음이 터진 적이 있어요. 소설은 이순신을 닮은 면접자가 소동을 부리고 간 후 ‘위인들의 얼굴 분석 딥러닝’을 통해 관상을 통해 직원을 채용하는 시스템을 마련하려는 회사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다룬 블랙코미디인데, 이런 대목이 등장했거든요. 성별 할당제랍시고 여성 위인을 많이 넣으라는 말 자체는 나도 동감하는 바였다. 어쨌거나 여성 위인도 많으니까. 단지 그 위인들의 사진과 이름을 구하기가 쉽지 않을 뿐이지. 천만다행으로 트위터에 한 이용자가 매일매일 그날 태어난 여성 위인에 대해 소개를 해놓은 아카이브를 찾게 되어 도움을 많이 받았다. 까마귀 프로필 사진을 사용..
인류 종말 이야기, 포스트 아포칼립스 아작 SF 10선 어느 시인이 제목으로 쓰면서 더 유명해진 말이지만, 북아메리카 원주민 아라파호족은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불렀다죠. 한 해의 남은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을 담은 말이겠지만, 무릇 사라지기 시작한 것들을 되돌리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기도 하거니와, 사실 사라지지 않는 게 있나요, 어디. 일전에도 어느 리뷰를 위해 썼지만, 인류의 멸종은 SF에서 흔히 다루는 소재입니다. 아예 종말 이후의 세계를 다룬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하위 장르를 형성할 정도이기도 하거니와, 미래에 대한 상상이라는 장르의 일반적인 특성으로만 보아도 인류의 멸망이라는 이야깃거리는 피할 수 없죠. SF 작가들이 그리는 인류 멸종은 전면적 핵전쟁이나 전염병, 기후 변화에 따른 자연재해, 거대 운석의 충돌처럼 흔..
우주가 가슴에 벅차오를 때 읽기 좋은 아작 SF 10선 가슴 졸이며 지켜본 누리호의 1차 시험 발사가, 약간의 과제는 남겼지만 멋지게 성공했습니다. 누리호는 아직 700킬로미터 상공에까지밖에 이르지 못했지만, 우리의 꿈은 분명 그보다 더 높은 곳에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인류의 꿈을 담은 아작 SF 10선을 소개합니다. 1. , 로버트 A. 하인라인 지음, 최세진 옮김 “SF계 최초의 명인이 쓴 청소년을 위한 우주의 꿈, 많은 이에게 인생의 첫 번째 SF였던 SF의 고전“ 20세기 중반 SF의 황금기를 대표하고 이끌었던 ‘빅 쓰리(Big Three)’의 일원인 로버트 A. 하인라인의 대표작 중 하나로, 하인라인의 팬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작품이다. 미국에 나사(NASA)가 생겼지만 아직 인류가 달에도 가지 못했던 1958년에 출간된 이래로 수많은 청소년들에게 우..
<극히 드문 개들만이> 작가의 말 : "이럴 줄은 몰랐다" by 이나경 이럴 줄은 몰랐다. 문서창을 열었을 때만 해도 ‘작가의 말’ 때문에 애먹으리라고는 예상 못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건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었으니까. 그냥 여흥 같은 거였으니까. 그런데 막상 쓰기 시작하니 그만 머릿속이 하얘진 것이다. 어림잡아 한두 시간이면 끝냈을 일을 사흘째 빈 화면만 노려보고 있다. 참다못한 아내가 그게 뭐 대수냐는 듯이 말했다. “자, 불러줄 테니까 받아 적어. 사랑하는 아내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오랜 세월 전폭적으로 지지해준 덕에 창작에 매진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내용이 책에 실리지 않으면 앞으론 국물도 없을 것이며….” 그러나 독자 제위께서 일개 필부의 가정사를 궁금해하실 리 만무. 어쨌거나 국물은 확보했으니 헌사는 이쯤 해두고, 이제 또 무슨 얘기를 쓸지 다시 골몰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