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욕망하는 것을 자제했던 적은 거의 없었다. 우리의 ‘더 잘 살고 싶다’는 욕망은 어마무시한 추진력으로 문명을 일구었다. 우린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할 것이다. 잠을 유전적으로 줄이는 것이 가능하고 거기에 보편적으로 걱정되는 리스크가 아무것도 없다면? 부작용도 좋은 부작용만 있다면? 안 할 이유가 없다. 그런 가정을 갖고 시작한 소설이 있다. 낸시 크레스의 『허공에서 춤추다』(정소연 옮김, 폴라북스, 2015)에 수록된 「스페인의 거지들」이다.
「스페인의 거지들」의 주인공 리샤는 유전자 조작을 통해 탄생한 불면인이다. 불면인은 잠들 필요가 없으며, 뇌 발달도 표준보다 우수하고, 노화하지 않는 신체를 가졌다. 리샤와 그의 아버지는 작중에 등장하는 자기계발의 선구자 겐조 요가이의 신념을 믿는다.
요가이는 복지가 절도나 폭력만큼 억압이라고 생각하는 열렬한 자유주의자다. 이 설정은 리샤가 탄생한 배경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부와 권력의 세습이 아니라 개인이 자수성가를 해서 부자가 되는 것이야말로 숭고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인공 리샤의 아버지는 자수성가를 더 잘할 수 있는 환경적 조건을 자식에게 주려 한다. 따라서 ‘노력을 더 잘할 수 있는 신체와 지능’을 생명공학을 통해 자식에게 선물한 것이다.
21세기의 우생학은 20세기와 다르다. 집단적 강요 대신 개인의 자율적 선택으로 더 우월한 자녀를 낳고자 한다. 사회 부적응자를 집단에서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유전적 특질을 선호하는 경쟁이다. 그 목표 또한 더 건강하고, 행복하고 더 잘 살 수 있는 유토피아를 제시하며 그 그늘은 없는 것 같다.
SF는 미래를 다루지만 작가는 현재에 있다. 현재는 과거가 구성했다. 과거 이념의 변화를 살펴보자. 계급의 시대가 있었다. 모든 차별과 사회적 위치, 직업, 소득, 교육수준 등은 선천적으로 부모에게 물려받는 계급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혁명 이후 평등과 자유의 시대가 있었다. 사람들은 계급에 상관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동일한 결과물을 획득할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만큼 사회적 위치, 직업, 소득을 획득했다. 그렇게 자유주의는 능력주의와 결혼했다. 남들보다 더 나은 능력은 더 많은 자본과 사회적 지위를 의미했다. 이는 사람들에게 천재를 동경하게 했다. 표준 규격에 미달하는 사람은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천재 신화는 알다시피 우생학을 사랑한다.
능력주의는 지능, 재능, 능력 등 결국 선천적인 차이에 의해서 사람들이 받게 되는 결과의 차별을 옹호한다. 부모의 교육수준, IQ, 성장 환경의 대물림은 간과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력주의는 계급주의와 달리 현 시대에서 정당화된다. 요가이의 말을 믿는 요가이스트들은 완벽하게 순수한 노력이 존재하며, 노력만이 성취에 영향을 주는 유일한 요소라고 믿는다. 그렇기에 복지가 억압이며, 불필요한 적선이라고 주장한다. 작중 겐조 요가이가 주장하는 이상은 여기에서 삐걱댄다. 노력의 크기가 곧 성취의 크기가 아닌데, 요가이가 말하는 노력의 크기를 잴 수단은 성취의 크기뿐이기 때문이다. 요가이가 말하는 ‘숭고한 인간’은 성취를 바탕으로 측정된다. 노력이 아니라.
누구는 하루 24시간을 오롯이 공부에 쓰며 ‘노력’을 할 수 있는 생물학적 전제가 다르고, ‘노력’과 ‘성취’의 상관관계가 지능으로 인해서 달라지며, 이 모든 게 돈으로 살 수 있는 유전적 특질에 의해 결정된다. 그 노력은 공정한가? 유전자 조작으로 부유한 부모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우수한 특질은 자유주의자 겐조 요가이가 비판하는 귀족과 다르지 않다. 소설 내에서 불수면인 리샤가 갖는 모순이다.
소설에서 리사를 비롯한 소수의 불면인들은 다수의 수면인(평범하게 잠을 자는 사람들)보다 훨씬 우월하기 때문에 배척받는다. 즉 사회의 지배계급이 아니라 계급갈등에 의한 피해자로 묘사된다. 엘리트를 혐오하는 무지한 대중과 자기방어를 하는 생물학적 엘리트의 대립 구도가 소설에서 치열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소설 말미에는 이 갈등을 이렇게 봉합한다. ‘엘리트들끼리만 있어서는 경제생태계를 유지할 수 없다. 자유주의 시장경제에서 아무런 가치를 창출하지 않는 쓸모없는 사람이라도 그들에게 복지를 베풀면 돌고 돌아 언젠가 엘리트들을 도울 수 있다. 세계는 순환하고, 도움도 순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도와야 한다.’
SF에서 시작했는데 근래 트렌드인 ESG(Environment Social Governance) 경영 이야기로 이어졌다. 흥미롭다. 기업은 사회와 공생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기업의 생존전략으로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있다는 논리와 닮아 있다. 어쩌면 기업에게는 그게 답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에 그게 답이 될까.
근본적으로 리샤와 불수면인들이 갖는 믿음이 타당한 것인가. 겐조 요가이와 같은 자유주의자나 자기계발서가 갖는 믿음이 정당한 것인가. 우리는 능력주의를 처음에 왜 옹호했는가. 무엇보다 낫다고 여기거나, 더 공정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지지했는가. 처음에 가졌던 우리의 믿음은 지금도 잘 실현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이 우리의 더 나은 의사결정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조금은 욕망을 자제하는 법을 배우게도 될 것이다.
강현, 소설가
1996년 제주에서 태어났고, 한양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친한 친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 소설 <나는 바나나다>를 썼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때 글을 쓴다. 근래 생각하는 주제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글을 쓰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누가 알아주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사악한 생각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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