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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 닥터로우의 짧지만 강렬한 단편, <프린트 범죄>

아작 책방/01 리틀 브라더

by arzak 2015. 9. 22.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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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틀 브라더>를 우리말로 옮긴 최세진 씨가 10여 년 전에 블로그에 올렸던, 코리 닥터로우의 단편 <프린트 범죄>를 올립니다(현재 해당 블로그는 폐쇄된 상태이며, 당시는 <프린트 한 죄>라는 제목으로 올렸습니다).

<프린트 범죄>는 코리 닥터로우의 단편 소설로서 3D프린터가 대중에게 알려지기 훨씬 전인 2006년 네이처(Nature)에 실렸던 작품입니다.

<프린트 범죄>는 the Creative Commons license를 따르므로 누구든지 비상업적으로 복제/배포할 수 있습니다. 이미 각국의 팬들에 의해 프랑스어, 스페인어, 일어, 폴란드어 등 10여 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배포되고 있습니다. 당시 블로그에 올리기 전에 코리 닥터로우에게 메일을 보내서 한국에서 번역해서 배포해도 되겠냐고 물었더니, 닥터로우 왈 “Of course, Sejin -- the Creative Commons license allows th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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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트 범죄(Printcrime)

by Cory Doctorow

번역 최세진

내가 여덟 살 때 짭새들이 아빠의 프린터를 박살냈다. 프린터가 뿜어내던 열기와 전자레인지에 식품 포장용 랩을 돌렸을 때 나는 것과 비슷하던 그 냄새, 그리고 아빠가 프린터에 신선한 찐득이를 채워 넣을 때 열중하던 모습과 프린터에서 갓 구워져 나온 물건의 감촉이 아직도 생생하다.

짭새들은 문으로 들어오며 곤봉을 휘둘렀고, 그중 한 명은 확성기를 들고 영장을 낭독했다. 아빠의 고객이 밀고한 것이었다. 정보경찰은 밀고자에게 행동 강화제, 기억 보충제, 신진대사 촉진제 같은 고급 약으로 대가를 지불했다. 그런 것들은 현금보다 더 가치가 있었지만,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집에서 직접 프린트해서 만들 수 있는 것들이었다. 큰 덩치들이 부엌에 갑자기 들이닥쳐서 곤봉을 휙휙 휘두르며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패고 온갖 것들을 부셔버리는 위험을 감수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짭새들은 할머니가 예전에 살던 나라에서 오실 때 가져온 여행 가방을 박살냈다. 소형 냉장고와 창문 위쪽에 달린 공기 정화기도 부셔버렸다. 내가 기르던 귀여운 새는, 경찰이 큰 군화발로 새장을 짓밟아서 엉킨 프린트 철망 뭉치로 만들어버렸을 때, 새장의 한쪽 구석에 몸을 숨겨서 겨우 목숨을 보존했다.

아빠, 그들은 아빠에게 무슨 짓을 했던가. 아빠가 체포되었을 때의 모습은 마치 럭비팀 전체와 한 판 난투극을 벌인 것 같은 몰골이었다. 그들은 아빠를 문 밖으로 끌고 나가, 기자들에게 사진을 잘 찍을 수 있도록 보여준 후 차 안으로 던져 넣었다. 그 사이 경찰 대변인은 아빠가 해적판 밀매 범죄 조직을 운영하면서 최소한 2천만 개 이상의 밀매품에 대한 책임이 있으며, 극악한 범죄자로서 체포시에도 불응하며 저항했다고 발표했다.

나는 거실에 남겨진 전화기를 통해 이 모든 과정을 봤다. 나는 그 모습을 스크린에 띄워놓고 지켜보면서, 어떻게, 아니 도대체 어떻게 우리의 초라한 단층집과 지독히 형편없는 살림살이를 보면서도 그걸 범죄 조직의 우두머리가 사는 집이라고 착각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들은 프린트를 가져가 전리품이라도 되는 냥 기자들에게 보여주었다. 프린트가 놓여있던 부엌의 그 조그마한 성소(聖所)는 끔찍하리만큼 허전해보였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납작하게 눌린 새장을 집어 들어 불쌍한 새를 구해준 후, 프린터가 있던 자리에 믹서를 올려놓았다. 믹서도 프린트로 만들었기 때문에, 한 달이 채 되기 전에 베어링과 구동 부품들을 새로 프린트해야만 하는 상태였다. 프린터가 있었을 때는 프린트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언제든지 분해하고 조립해서 만들어낼 수 있었다.

아빠는 내가 열여덟 살이 되어서야 감옥에서 나왔다. 그동안 나는 아빠를 세 번 면회했다. 내 열 살 생일과 아빠의 쉰 살 생신날, 그리고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내가 아빠를 마지막 본 게 2년 전이었는데, 그 때 아빠는 상태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감옥 안에서의 싸움 때문에 다리를 절룩거렸고, 마치 틱 경련이라도 있는 것처럼 계속 고개를 돌려 어깨 너머로 뒤를 쳐다봤다. 소형 택시가 우리를 집 앞에 내려주었을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라 당황스러워서 집안으로 들어가 위층으로 올라가는 내내 처참하게 망가지고 절룩거리며 해골처럼 삐쩍 마른 아빠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으려 했다.

“래니.” 아빠가 나를 앉히며 말했다. “난 네가 영리한 아이라는 걸 알아. 이 늙은 애비가 어디를 가야 프린터와 찐득이를 구할 수 있을지 너는 알고 있겠지?”

나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말했다. “아빠, 아빠는 감옥에 10년 동안이나 갇혀 있었어요. 장장 10년이라고요. 믹서나 약품, 노트북 컴퓨터, 예쁘게 생긴 모자 따위를 프린트하느라 또 10년을 감옥에서 보낼 작정이세요?”

아빠가 씩 웃었다. “래니, 난 바보가 아니야. 그동안 교훈을 얻었어. 모자나 노트북 컴퓨터 따위는 감옥에 갈 정도로 가치가 없어. 난 다시는 그런 쓸데없는 허접쓰레기를 프린트하지 않을 거야. 절대로.” 아빠는 찻잔을 들고 와서 위스키라도 되는 것처럼 한 모금 홀짝하더니, 잔을 쭉 들이켜고 만족스러운 한숨을 뱉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래니, 이리 와봐. 너한테 긴히 해줄 말이 있어. 내가 감옥에서 10년을 보내며 결심한 걸 이야기 해줄게. 이리 와서 이 어리석은 애비의 이야기를 들어봐.”

아빠에게 화를 낸 것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아빠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건 확실했다. 감옥에 있는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을 겪으셨던 걸까. “뭔데요. 아빠?” 나는 아빠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래니, 나는 이제 프린터를 프린트할 거야. 더 많은 프린터를 만들어내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눠줄 거야. 그거라면 감옥에 갈만한 가치가 있어. 그거라면 어떤 일을 당해도 할 만한 가치가 있어.”

원문 : http://craphound.com/?p=573




SF 장르 전문 출판사 <아작>의 첫번째 책은 코리 닥터로우의 대표작 <리틀 브라더>이다. 2008년에 나온 <리틀 브라더>는 미국 사회의 관점에서는 ‘근미래 SF’이자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조지 오웰의《1984년》의 ‘빅브라더’를 본딴 책 제목부터가 그 사실을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국토안보부는 특정 소수에 대해 불법적 인신구속과 고문을 자행하고, 불특정 다수에 대해선 광범위한 인터넷 검열과 정보기기를 활용한 사생활 정보 수집 그리고 수집된 정보를 활용한 불심검문 등을 시행한다. 테러 직후 국토안보부에 억류됐다 풀려난 소년은 ‘특정 소수’로서 그들에 대해 분노하고 ‘불특정 다수’의 권익을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일은 꼬여만 가는데... 마커스와 그 친구들의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긴장감 넘치면서도 통쾌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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