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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이승의 선지자' 리뷰 - 매드 사이언티스트와 작은 보살님이 만나서

아작 리뷰/31 저 이승의 선지자

by arzak 2017. 11. 27.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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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드 사이언티스트와 작은 보살님이 만나서




*본문에는 이 소설의 스토리를 설명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부분이 스포일러라고 판단될 경우 먼저 책을 읽고 나서 다시 본 리뷰를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저 이승의 선지자]를 낯설게 느끼는 독자들이 꽤 계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동양 신화에 나오는 용어가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겠죠. 여기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립니다. 이삼십 쪽 정도를 찬찬히 읽으시면 좀 편해집니다. 20세기부터 SF를 읽어오신 분이시라면 옛 에피소드 하나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요. 로저 젤라즈니의 [신들의 사회]가 정신세계사를 통해 한국에 처음 소개됐을 때도 비슷한 얘기가 나왔습니다. '이 소설은 진짜 재미있는데 초반에 낯선 용어들에 익숙해지기가 정말 힘들다'고 했었지요. 맞습니다. [신들의 사회]는 참 재미있는 소설이었죠. 낯선 용어에 익숙해지기만 한다면요. 같은 말을 [저 이승의 선지자]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재미의 종류는 다르지만요. 왜냐하면 [신들의 사회]와 [저 이승의 선지자] 모두 동양 신화와 종교의 낯선 용어와 세계관을 가져왔으되, 거기에 담긴 내용은 사실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신들의 사회]의 경우 미국 전통의 영웅 서사 중 하나인 서부극과 닮아 있었죠. 그리고 [저 이승의 선지자]는, 그러니까, 제 생각에 이 작품과 가장 가까운 소설은 역시 로저 젤라즈니가 쓴 것입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중편 <프로스트와 베타> 말이죠.

 

우선 [저 이승의 선지자]의 스토리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우주에는 본래 하나의 존재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완벽한 지성이었지요. 그 존재는 홀로 오래고 오랜 시간을 보내다가 '분열'을 했습니다. 이렇게 완전한 하나로부터 초기에 분열한 개체를 '선지자'라고 합니다. 선지자들은 태초의 존재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으므로 완벽한 우주가 어땠는지를 알고 있고, 자신들 역시 분리된 개체가 아니라 실제로는 하나의 존재가 나뉜 것에 불과함을 알고 있습니다. 너와 내가 다르지 않고 온 우주가 곧 나와 하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요. 이들이 머무는 세계를 '명계'라고 합니다. 번뇌가 없으므로 도처가 밝은 세계. 불교 설화 같지요. 실제로 많이 닮아 있습니다.

 

몇 명의 선지자들 중 아이시타라는 이름의 선지자는 다시 분열을 진행합니다. 아이시타는 나반과 아만이라는 이름의 선지자로 나뉘었습니다. 그중 아만은 매우 독창적이고 재기발랄한 개체였지요. 아만은 완벽한 존재인 선지자들이 모르는 세계, 즉 결핍과 불완전함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경험하고 거기에서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불완전한 세계인 (우리가 이승이라고 부르는) '하계'를 고안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을 비롯한 명계의 존재들이 하계로 뛰어들 수 있도록 생명체들을 디자인했지요. 선지자들은 보다 적극적인 학습을 위해 잠시 기억을 지운 채로 하계의 생명체들 속으로 들어갑니다. 거기서 삶을 겪고 죽으면 다시 명계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원한다면 다시 하계의 생명 속으로 들어가 삶을 살 수 있지요. 이것이 윤회입니다.

 

자, 이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아만은 윤회를 거듭할수록 자신이 고안한 하계의 삶에 점점 더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윤회를 통해 뭔가를 배울 수 있다면 하계의 삶이 진짜라고 믿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아만은 점점 하계의 삶이 진짜 삶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명계의 존재들이 보기에 하계의 삶이란 생사고락을 경험한 뒤에 다시 본래 세계로 돌아오는 일종의 여정에 불과합니다. 그들에게 하계의 삶은 시뮬레이션이고 가상현실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아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만을 '타락'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한 선지자의 타락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아만이 하계의 삶에 개입하기 시작했고, 하계에서 아만에게 감응한 몇몇 명계의 존재들 역시 그에 동조-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아만은 하계의 존재들을 가능한 급격히 진보시키고 이 우주의 비밀을 알리고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게끔 이끄려 합니다. 아만은 우주가 하나이고 윤회는 계속된다는 진리가 아니라 부질없는 단 한 번의 삶이 '나'라는 존재의 전부라는 가짜 진리를 퍼뜨리려 합니다. 결국 아이시타로부터 아만과 함께 세상에 나온 분열체, 선지자 나반이 아만을 멈추려 합니다. 그와 '합일'함으로써 다시 평온한 아이시타의 의식으로 돌아가려는 것이죠. 비록 그간 경험한 것들로 인해 이전의 아이시타가 될 수는 없겠지만요.

 

스토리 요약은 일단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2. 

나반과 아만, 아이시타는 고대 한국 신화에 등장하는 이름입니다. 나반과 아만은 인류의 조상이고 아이시타는 그들이 신의 인도에 따라 만난 땅의 이름이지요. 아이시타에서 하나가 된 두 인간이니, [저 이승의 선지자]에서 캐릭터들의 이름이 어떻게 정해졌는지는 바로 알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재미있는 우연의 일치가 있습니다. 한자 표기는 다릅니다만, 불교에도 아만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불교사전에 따르면 아만은 '일시적 화합에 지나지 않는 신체에 불변하는 자아가 있다는 그릇된 견해에서 일어나는 교만. 자아가 실재한다는 교만'이라고 합니다. 마침 이 소설의 아만과 많이 닮아 있지요. 이외에도 [저 이승의 선지자]에 등장하는 윤회니 도솔천이니 하는 아이디어와 용어들은 불교를 자주 떠올리게 합니다. 등장인물들의 대화 역시 선문답처럼 느껴질 때가 있고요. 

 

그렇지만 [저 이승의 선지자]는 그 스타일을 빌려 온 불교와는 아주 다른 길을 선택한 소설입니다. 그러니 재미있는 SF를 원하는 독자 여러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소설에는 낯설은 개념을 깊이 곱씹으며 사색에 잠겨야 하는 부분은 나오지 않습니다. 어느 시점이 지나면 점점 속도를 높이는 스토리를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불교와 [저 이승의 선지자]의 차이를 체크하면 더 많은 걸 볼 수 있습니다. 한 번 체크해 보겠습니다. 책 리뷰 입장에서는 좀 돌아가는 이야기입니다만 불교의 기본 개념들은 다른 책을 읽을 때도 도움이 될 테니 같이 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금강경에서 부처는 제자 수보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보살이) 이렇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을 제도시키더라도 실로 제도를 받은 중생은 하나도 없다. 왜 그런가?"  무슨 말인가 하면, 보살은 중생에게 가르침을 전할 수는 있지만, 깨달음을 직접 안겨주지는 못한다는 뜻입니다. 중생 각자가 배움을 화두로 삼아 정진하여 스스로 깨우치는 수 외에는 다른 수가 없습니다. 이는 이 세상 전체의 생명-개체들이 스스로 자신의 업장을 짊어진 채 억만 번을 살아나가고 또 살아나가서 법열의 단계에 오르는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저 이승의 선지자]에 등장하는 선지자들은 절대 완벽한 존재로부터 완벽에 대한 기억과 개념만 가진 채 분열해나왔기 때문에 이러한 시행착오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계속 하계로 윤회하여 이런저런 '삶'과 그 안에 있는 오욕칠정을 반복 경험하고자 합니다(그러나 선지자들은 새로 윤회할 삶을 고를 때 어떤 단계와 법도를 따르는 게 아니라 그냥 본인들이 내키는 곳으로 갑니다. 이 선택이 이미 오욕칠정에 의한 것이죠).


또한 선지자들은 완벽에 기인한 자신들의 '본래'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고 타락한 이를 강제로 격리하거나 합일-흡수-합니다. 심지어 시스템을 유지 관리하기 위해 일종의 백신 같은 걸 만들기까지 했습니다. 선지자들은 본래 모든 것이 하나였고 거기서 지금의 모든 세계가 태어났으므로 세계가 본래 하나임을, 내가 우주 전체와 형제임을 알고 있습니다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결핍이라는 개념을 결핍하고 있지요. 그들은 완벽의 세계에서 났으므로 결핍이 무엇인지를 모르며, 그래서 두려워합니다. 뭐랄까, 너무 인간적이죠. 낯선 존재를 두려워하고 방벽을 쌓고...

 

다시 금강경으로 돌아가 볼까요. 아까 부처가 했던 얘기는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갖는다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따로 설명하기는 너무 먼 여정이니 넘어가겠습니다. 네 개의 상을 합해 사상이라고 하며, 이 하나하나의 상들은 일종의 관념과 같은 것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사람은 관념으로 인해 '나'와 세상 만물을 구별하게 되고 생각을 시작합니다. 고요한 바다에 파문이 일기 시작합니다. [저 이승의 선지자]에 등장하는 선지자들은 이에 따르면 보살에 미치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앞서 말했듯 선지자들은 결핍이라는 미스터리를 두려워합니다. 결핍은 '우리' 선지자들과 '다른'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구별이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이 소설 속의 선지자들은 이미 사상을 가진 이들로 보살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럼 아만의 경우는 어떨까요. 심지어 기존의 선지자들에 반대하고 하계의 존재들을 더 높은 곳으로 이끌기를 원하는 아만조차 보살에 미치지 못합니다. 부처가 방금 던진 말은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관념을 가지고 세계의 구성요소를 구별하는 자로서, '타인'에게 가르침을 주고 타인의 깨달음을 함께 기뻐하며, 이로 인해 뿌듯해하고 인류에게 기여한다는 사명감을 갖는 이는 보살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보살은 나와 남을 구별하는 사상에 물들지 않았으므로, 중생을 구원하면서 기뻐하지도 뿌듯해하지도 않고 구하지 못해서 안타까워하거나 한심해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중생을 제도시키더라도 내 제도를 받은 중생은 없'습니다. 부처는, 보살은, 배움을 구하는 이들을 바람처럼 스쳐 지나갈 뿐입니다. 여래如來라는 이름이 그렇게 생겼습니다. 여래는 영원히 오고 있으며, 그러므로 결코 나에게 당도하지는 않으며, 그러나 오래 전부터 오고 있었고 앞으로도 올 것이므로 내 주위부터 저 우주 멀리까지에 펼쳐진 삼라만상이 모두 여래의 현현인 것입니다. 여래는 세계에 이런저런 경계를 세운 개념들 사이로 '마치 봄날의 꿈이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것처럼*' 잠입합니다. 반면에 [저 이승의 선지자]에 등장하는 많은 선지자들은 삼라만상이 하나임을 말하지만 실제로 바람과 같이 흘러가는 이는 한 명도 없습니다.


따라서, 만약 [저 이승의 선지자]가 불교의 이상을 재현하고자 한 소설이라면 명백히 잘못된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저 이승의 선지자]는 앞서 말씀드렸듯 그와 다른 길을 선택한 소설입니다. 작가가 의도한 바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책의 제목이 이미 그렇다고 말해줍니다.



3.

'저 이승'이라는 말은 저기와 구별할 수 있는 '여기'를 전제로 합니다. '여기'는 어디일까요. 말 그대로 명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려면 그냥 제목을 [이승의 선지자]라고 할 수도 있었겠지요. 소설 본문에 힌트가 있습니다. 선지자가 명계-저승과 하계-이승의 개념을 반대로 생각하는 부분이 나오지요. 간단한 이야깁니다. 선지자들에게는 명계가 이승입니다. '이 세계'입니다. 그리고 하계가 저 세상이지요. 따라서 '저 이승'이라는 말은 그 발화 주체가 누구냐(선지자냐 지상의 피조물이냐)에 따라 '이승'이 지시하는 대상이 역전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소설의 제목이 무척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에 진정한 저승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두 개의 이승이 존재할 뿐임을 알려주는 시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지자들과 지상의 피조물들 각자의 존재 양식에 걸맞는 두 개의 이승이지요. 따라서 [저 이승의 선지자]는 애초에 법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깨달음은 이 소설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삶에 대해 서로 다른 개념을 가진 존재들이 서로 접근하면서 '삶'을 새롭게 조명하는 이야기입니다. 처음부터 이승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마치 외계인과 인류라는 두 지성체의 만남을 다룬 퍼스트 인카운터처럼요.


채널예스에 실린 김보영 작가의 인터뷰를 보면 작가는 그리스 신화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각자 우주와 인간의 어떤 특성을 상징하는, 인간과 닮은 신들이 나오죠. [저 이승의 선지자]에 등장하는 선지자들 역시 태초의 우주에 대한 지식은 공유하되 각자 다른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이 점은 그리스 신화와 닮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나반과 아만은 또다른 서구 신화와 상당히 닮았습니다. 그 형태뿐만 아니라 문제의식까지도 말이죠. 바로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입니다.


닮은 점을 열거해 볼까요. 우선 아담과 이브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신이 자신과 닮은 피조물을 창조하고 아담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어서 아담의 갈비뼈를 떼어다 이브도 만들었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서 오직 평온한 상태로 잘 살았습니다. 그러다 이브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신으로부터 주어진 것 바깥을 탐한 그 행위는 인간의 원죄가 되었죠. 아담과 이브는 타락했습니다. 그들은 오욕칠정에 눈을 떴고 수치심에 나뭇잎으로 성기를 가렸으며, 이로 인해 낙원으로부터 추방당해 고난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 이승의 선지자]입니다. 나반과 아만은 분열하기 전의 아이시타였을 때는 오직 평온한 상태로 잘 살았습니다(고대 신화에서 아이시타가 지명이었음도 다시 떠올려 봅시다). 아이시타는 자신을 둘로 나누어 나반과 아만을 창조했습니다(신화에서는 나반이 남자, 아만이 여자임을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아만이 현재 자신들이 갖고 있는, 완벽으로부터 기인한 지식 이외의 세계로 나가기 위해 하계를 창조합니다. 그것이 원죄가 되었습니다. 다른 선지자들은 아만을 '타락한 존재'로 규정합니다. 그러나 아만과 함께 세상에 난 나반은 아만에 대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또한 자신 역시 아만이 고안한 세계의 오욕칠정에 조금씩 물들어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이런 이미지를 상상해 볼까요. 아담과 이브의 후예인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가 있고, 우리와 닮았지만 선악과를 먹지 않은 이들의 자손들이 살아가는 에덴이 우리 세계를 둘러싸고 있다고 말이죠. 타락하지 않아서 신과 더욱 닮아 있고 그래서 보다 더 전능한, 인류의 먼 친척들이 우리를 내려다본다고 말입니다. 대체 선악과는 무슨 맛이었고 그게 무슨 꿈을 꾸게 해 주었는지 계속 궁금해하면서 말이죠. 그래서 그들은 종종 '이 이승'에 사는 우리 사이에 들어와 같은 삶을 살아 보지만, 마치 여행자들이 그러하듯 자신이 방문한 곳의 삶을 진정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그들의 집은, 그들의 존재 양식에 맞는 시스템은 따로 있으니까요. 다시 에덴으로, 자신의 삶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이들... 낙원의 인간과 추방당한 인간. 두 개의 다른 시스템. 두 개의 이승.


그렇습니다. 이 소설에는 신에 버금가는 능력을 가진 자들이 있을지언정 신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신들이 사는 세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존재 양식을 가진 두 개의 이승이 있을 뿐입니다. 다만 둘 중 하나가 나머지 하나를 창조했으므로 종속관계로 보이는 것뿐이죠. 명계와 하계는 명백히 위계가 나뉘었으므로 서로 다른 세계 같지만 한 발 떨어져서 보면 그저 형태가 다른 사바세계에 불과합니다. 어제의 꿈과 오늘의 꿈이 다르듯이, 그러나 꿈은 모두 꿈이듯이요.


명계와 하계라는 두 개의 이승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명계는 결핍을 결핍한 지성들의 순수한 실험 공동체이며, 하계는 그들이 만들어 낸 실험용 생태계 또는 샌드박스라고요. 선지자들이 하계에 대해 갖는 윤리란 일종의 실험실 윤리입니다. 실험용으로 배양한 피실험체의 생사와 고통은 실험자-선지자들의 관심사 밖에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선지자들은 마치 과학자의 직업적 특성만을 강화한 존재들 같습니다. 감정을 결여한 순수한 지성체답지요. 애초에 아만이 하계를 디자인한 것도 과학자다운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호기심과 상승심. 더 많은 것을 직접 확인하고 데이터를 도출하고픈 마음. 결핍과 제한에 묶인 삶으로만 얻을 수 있는 '정보'를 얻고 싶다는 마음이죠. 그는 하계에서의 삶을 통한 탐구 효율을 높이기 위해 극한까지 노력했고, 그 결과 그곳의 삶을 사랑하게 되어버렸습니다. 탐구의 극단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피조물(또는 거기에 투영된 자신의 욕망)과 사랑에 빠지는... 우리는 이런 비뚤어진 이들을 사랑하죠. 한국에서도 원어 그대로 매드 사이언티스트라고 부르면서 기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 이승의 선지자]의 명계, 신과 비슷한 이들이 사는 세계를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매드'하지 않은 과학적 정신과 지식의 집합체, 냉정한 지성의 정수라고요. 지성은 깨달음과 같지 않습니다. 타락하기 전의 아만이 동료 선지자들에게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라고 말했던 것도 이와 같은 의미에서였을 겁니다. 아만은 선지자들이 가지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현상으로부터 의미를 찾고자 하는 마음 말이죠.



4.

이러한 설정은 SF의 세계에서 형태를 조금식 달리 하며 종종 등장했습니다. 주로 초지능을 갖춘 AI의 형태로요. 제가 [저 이승의 선지자]와 닮은 작품으로 말했던 <프로스트와 베타>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인류가 전쟁을 위해 만든 AI가 인류 종말 뒤에도 살아남았고, 이미 사라진 인류가 입력해놓은 명령을 덧없이 수행하며 아주 오랜 시간을 보낸 끝에 자신을 창조한 존재들의 불완전한 몸과 마음을 연구하기 시작하죠. 네, 그리고 거기에 빠져듭니다. 미스터리니까요. 필멸하는 삶의 한정된 시간을 쏟아붓게끔 만드는 강렬한 열망들... 사랑 같은 것들에요. AI는 과학적 탐구와 시행착오를 통해 오욕칠정을 '발견'합니다.


[저 이승의 선지자]도 이와 비슷한 길을 갑니다. 나반은 필멸자의 삶을 발명하고 그에 과몰입한 아만의 심정을 헤아리는 과정에서 내가 다른 존재를 사랑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가지요. 러브스토리입니다. SF다운 러브스토리 플롯이죠.


<프로스트와 베타>는 창세기를 대단히 멋지게 변주한 작품입니다만, 러브스토리로 보면 좀 아쉬움이 있습니다. 사랑이 싹트는 두 존재 사이에 파트너십이 존재한다기보다는 프로스트가 혼자 북치고 장구치면서 다 해먹는다고 할까요. 외로운 총잡이를 좋아하는 로저 젤라즈니는 러브스토리에서도 '강하고 멋지고 이것저것 알아서 다 해결해 버리는 남자' 이미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저 이승의 선지자]는 아만이 펼쳐놓은 우주 위에 나반의 마음이 더해짐으로써 비로소 조화로운 사랑 이야기가 만들어집니다.


아만이 명계와 하계 사이에서 프로메테우스적인 고뇌를 했다면, 나반은 명계와 프로메테우스 사이의 새로운 빈 공간에서 고뇌하는 자입니다. 아만이 고민하지 않고 하계의 삶에 진정성을 부여했다면, 나반은 여전히 두 이승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그 고민의 근원에는... 글쎄요, 적당한 단어를 찾기는 어렵습니다만, 역시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이런 모습입니다. 이브가 선악과를 먹으려고 막 손에 쥐었을 때, 그 옆에서 이브를 바라보는 아담입니다. 저는 에덴 동산 이야기를 떠올릴 때마다 그때 아담의 표정이 어땠을까 궁금해합니다. 공포와 슬픔과 애정이 함께 깃든 표정은 어떨까요. 말로는 전하지 못한 채 침묵 속에서 사랑하는 이와 그가 쥔 선악과를 바라보는 표정 말입니다. 제 능력으로는 이 마음을 간략히 줄여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저 이승의 선지자]에서는 나반이 아담의 역할을 맡습니다. 이브를 사랑한 아담. 매드 사이언티스트를 사랑한 그의 소울 메이트. 사랑하므로 침묵했고 곁에서 그저 오래도록 지켜보았던 존재. [저 이승의 선지자]는 나반으로 인해 비로소 완성됩니다. 소설의 설정은 아만이 거의 다 만들어 놓았습니다만, 그 세계에서 꽃을 피우는 이는 나반입니다. 자신이 만든 세계와 스스로 사랑에 빠진 아만과 달리 나반은 그런 아만을 곁에서 지켜보고 걱정하고 그를 중지시켜야 하나 놓아두어야 하나 고민합니다. 나반은 심지어 자신의 이런 고민이 타락의 징후임을 알고도 그 고민을 멈추지 못합니다. 이 어쩔 수 없는 마음이 특별합니다. 다른 선지자들도 아만도 스스로가 지지하는 시스템과 신념에 몰두하지만, 오직 나반만은 나의 세계나 내가 믿는 것 바깥에 있는 존재를 염려하고 아끼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 마음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을, 나다움을 포기해야 할 때가 오더라도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겠지요. 'The 러브스토리'입니다.


김보영 작가는 처음에 중편으로 이 소설을 썼을 때 합일과 분리 중에 어떤 것이 더 나은지 결정하지 못했고, 막연히 합일 쪽으로 기울었다고 했지요. 그러다 이번에 다시 쓰는 과정에서 분리를 선택했다고요. 분리가 너와 나를 구별했고 거기서 너를 사랑하는 내가 피어날 수 있었습니다. 좋은 결정입니다.


이 소설이 합일에 대한 이야기가 되려면 선지자들이 보살과 같은 이들이어야 했을 겁니다. 그러나 명계의 존재들은 결핍을 결여했고, 불완전했고, 자의식이 너무 강해서 하계를 끌어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들은 '분리'하기에는 그만큼 더 좋은 조건입니다. 분리를 선택한 이야기는 설정과 잘 맞물립니다. 자연스럽고 부드럽습니다.



5.

만약 이 소설이 깨달음에 대해 말하는 바가 있다면, 보살이 아닌 자가 어떻게 보살도의 초입에 오를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겠습니다. 이 독특한 러브스토리는 다른 존재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어리석은 업장의 세계에 스스로 발을 들임으로써 깨달음을 향한 첫걸음을 내딛습니다. 얻었다는 게 아닙니다. 앞으로 나유타만큼의 삶을 살고 부질없는 욕망에 시달리고 온갖 업장을 짊어지기를, 비로소 진심으로 선택했다는 뜻입니다.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이 소설의 끝은 아름다운 시작으로 이어집니다.


네, 아름다운 이야기지요.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저 이승의 선지자]에 실린 마지막 단편은 본편과 다른 결말들을 선보입니다. 바뀐 결말에 따라 앞선 스토리의 정서도 함께 달라지는 걸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재미있는 경험입니다. 세 가지의 새로운 결말 모두 재미있습니다만, 저는 특히 세 번째 결말이 인상깊었습니다. 이 결말은 [저 이승의 선지자]를 <프로스트와 베타>가 아니라 [신들의 사회] 풍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판타지물 특유의 초현실적인 액션을 예비하는 응축된 힘이 맴돕니다.


그러나 제가 이 세 번째 결말을 따로 소개해 드리는 이유는 이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게 느껴져서가 아닙니다. 겉으로 보기에 나반이 본편과는 완전히 다른 선택을 했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평행 세계인 다른 결말들 속에서 나반은 서로 다른 상황과 마주하고 그에 따라 서로 다른 선택을 합니다. 그런데 이 선택들에는 일관성이 있습니다. 측은지심입니다. 본편에서 사랑을 끌어안고 스스로 오욕칠정의 나락으로 떨어진 이는 다른 우주에서, 다른 선택을 하면서도 비슷한 기준에 의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측은지심입니다. 이 추가된 결말들 속에서 나반은 더 많은 것들을 측은해하며 마음을 써 보살핍니다. 저는 처음 본편의 결말을 읽고 이 러브스토리가 보살도와 이어질 수 있는가를 잠시 고민했지만, 서로 다른 결말들 속에 등장하는 나반의 다른 선택들을 본 뒤에는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작은 보살님, 그러나 이미 충분한 보살님. 나반은 책이 끝나갈수록 점점 큰 존재가 됩니다.


아마 이러한 특징이 [저 이승의 선지자]를 읽는 가장 큰 즐거움일 겁니다. 김보영 작가는 인터뷰에서 (역시 로저 젤라즈니의 예를 들면서) 일부러 작품 속 설정에 빈 공간을 남겨둔다고 했지요. [저 이승의 선지자] 역시 그런 빈 공간들을 갖고 있고, 독자의 삶과 마음이 그곳을 채워가게 됩니다. 이 글이 생각보다 길어진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이 책이 주는 독특한 감동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찾으려고 빈 공간을 더듬다가 생각보다 깊은 곳까지 다녀와야 했지요. 외전과 추가된 단편까지 포함해도 채 300페이지가 되지 않는 이 작은 책에는 그만큼 깊은 세계가 담겨 있습니다. 너무 맑아서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다 속으로 천천히 잠겨드는 듯한 특별한 즐거움이요. 한번 경험해보시기 바랍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셨길 바랍니다. 어떤 하루였더라도요.

그리고 내일도 그러하시기 바랍니다.


합장.




p.s: 본문에서 *로 표기한 부분 및 금강경 인용은 남회근의 [금강경강해]에서 발췌한 것임을 밝힙니다.

p.s 2: 이런저런 의견을 남겨주시면 다음 리뷰 작성 시에 참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