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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작 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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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영 소설집 <얼마나 닮았는가> 리뷰: 우주 예찬을 하고 싶어서 인간 세상에 방문한 중단편의 신 by 문목하 우주 예찬을 하고 싶어서 인간 세상에 방문한 중단편의 신 문학의 전당에는 아담한 통로가 하나 따로 나 있어야 한다. 느리지만 꾸준히 일하는 작가의 신간이 나왔을 때 독자가 버선발로 뛰쳐나와 마중 갈 수 있는 통로가 필요하다. 아마 전 세계 대부분의 애독자가 이 통로를 자신의 것으로 삼겠지만, 나는 조용히 통로 끄트머리에서 하나의 이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제 김보영의 신간이 나왔으니, 환호하며 버선발로 뛰어나갈 순간이 왔다. 여러 선집의 형식으로 출간된 김보영 작가의 다양한 단편들을 챙겨 읽은 독자들은 , , , , 와 같은 기존작이 대부분의 페이지를 차지한 이 소설집이 최신작으로 느껴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주로 서점 산책을 통해 책을 만나는 독자라면 쉽게 발견하지 못했을 , , , , 가 새롭..
홍지운 장편소설 <무안만용 가르바니온> 리뷰: 아, 이 책 정말, ㅋㅋㅋㅋ. by 김보영 2008년에 ‘환상문학웹진 거울’ 독자 투고란을 돌아다니다가 인상적인 글을 발견했다. 라는 단편이었다. 결혼식 1시간 전 화장실에 갇혀버린 한 신랑의 이야기였다. 좁고 지저분하고 지린내는 진동하고, 먹을 것은 변기 물과 휴지밖에 없고, 죽으려 해도 변기 물에 코 박고 죽을 도리밖에 없고, 삶과 죽음의 고뇌는 오가는데 뭘 해도 꼴사납기만 하다. ‘훌륭하네.’ 나는 생각했다. ‘돌다 보면 이렇게 재미있는 글이 있다니까.’ 그다음 달에도 독자 투고란을 돌다가 또 재미있는 글을 발견했다. 라는 단편이었다. 길에서 5백 원짜리 동전을 줍는 것으로 시작된 행운이 걷잡을 수 없이 몰아쳐서, 행운을 감당할 수가 없게 된 주인공이 어떻게든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려 안간힘을 써도 상황이 행운으로만 치닫는 이야기였다. ‘멋지..
문목하 장편소설 <유령해마> 리뷰: 천재는 이처럼 예고도 없이 나타난다 by 김보영 천재는 이처럼 예고도 전조도 없이 나타난다 《돌이킬 수 있는》의 문목하 작가가 돌아왔다. 전작에서 SF의 온갖 장치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며 세기의 로맨스를 선보인 작가가, 전작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벌써 돌아왔다. 이미 ‘이처럼 큰 사랑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은 이야기를 해 준 작가가 놀랍게도 한 번 더 ‘아니, 다시 볼 수 있었네’ 하고 감탄해 마지않을 이야기를 한다. 전작처럼 SF의 장치를 날아다니듯이 활보하는 것은 물론이다. *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 인간사에 관여하는 ‘해마’. 표면상으로는 데이터의 현신이며 인간의 도구이지만, 그 행태는 인류를 지켜보고 관여하며 돕는 작은 토속신들이나 다름없다. 작가는 놀랍게도 AI의 시선에서 세상을 서술하는 것만으로, 미래의 유비쿼터스 세상을 작은 신들이 ..
애들, 캐롤 엠쉬윌러 지음 신해경 옮김, <야자나무 도적> 수록작 새로 애들을 데려와야 했다. 남자애들이란 정말로 무모하고 성급하고 앞뒤도 없고 무분별하다. 그놈들은 연기와 불구덩이와 전장 속으로 앞다투어 뛰어들었다. 난 열두 살 먹은 내 아들 하나가 절벽 꼭대기에 서서 소리를 지르며 적에게 맞서는 걸 본 적도 있다. 너무 분별이 있어서는 메달을 딸 수 없는 법이다. 우리는 어디서든 남자애들을 훔쳤다. 우리 편 애들이든 저쪽 편 애들이든 개의치 않았다. 자기가 어느 편이었는지 알기나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애들은 금방 잊어버렸다. 무엇보다 일곱 살짜리들이 무얼 알겠는가? 애들한테 우리 깃발이 제일 멋있고 예쁘다고, 우리가 최고고 제일 똑똑하다고 말해 보라. 애들은 믿는다. 애들은 군복을 좋아한다. 깃털이 달린 화려한 모자를 좋아한다. 애들은 메달 따는 걸 좋아한다..
공포, 파멜라 사전트 지음 신해경 옮김, <야자나무 도적> 수록작 샘의 가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남자애들 둘이 내 차 바퀴 윗부분을 쳐서 차를 길 밖으로 밀어내고는 다른 목표를 찾으러 쌩하니 달려갔다.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는데 목구멍이 꽉 막히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녀석들은 최소한의 기능만 남겨놓고 차의 부품들을 싹 벗겨내면서 분명 안전장치 따위도 다 내다 버렸을 테지만 고속도로 순찰대가 자신들을 세우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경찰한테는 다른 걱정거리들이 있으니 말이다. 안전벨트가 날 붙잡아주었다. 차의 계기판 불빛들이 깜박거렸다. 차가 다시 도로 위로 올라가기를 기다리는데 엔진이 윙윙거리다 콜록거리더니 죽어버렸다. 난 수동 운전으로 전환했다. 엔진은 아무 말이 없었다. 막막해졌다. 피난처를 떠나 바깥 세계로 나가는 이 드문 여행에 대비해 나는 마음의 준비를 단..
너를 위해서 , 천선란, <어떤 물질의 사랑> 수록작 “당신의 아이입니다. 감회가 어떠세요?” 솔직히 말해서 손가락으로 눌러보고 싶었다. 무언가를 쥐었다는 느낌조차 없이 터질 것 같았다. 그는 둥그런 어항같이 생긴 인공자궁에 똬리를 튼, 쌀알처럼 아주 작은 자신의 ‘씨’를 바라봤다. 출입할 때 큐레이터가 준 돋보기를 들었다. 6주밖에 되지 않은 아이는 3등신의 새끼 새우 같았다. 거기까지 제멋대로의 상상을 마치고 그는 손가락 마디에 느껴지는 가짜 감각을 없애기 위해 바지춤에 손을 문질렀다. 본능에 가까웠던 끔찍한 생각을 한편으로 치우자 곧 황홀하기 이룰 데 없는 행복감으로 빠졌다. 그에게도 드디어 아이가 생겼다. 그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와 콧잔등에 흐른 땀을 훔치고는 큐레이터를 바라봤다. “무, 무척 아름답습니다. 정말 예쁘네요.” 전날 밤 그는..
[야자나무 도적 사전연재. 1] <늑대여자>, 수전 팰위크 지음, 신해경 옮김 시간이 문제였다. 시간과 산수가. 넌 처음부터 숫자가 문제를 일으키리라는 걸 알았지만, 그때 넌 훨씬 어렸다. 훨씬 어렸고 훨씬 덜 현명했다. 그리고 문화적 충격도 있었지. 네 고향에서는 여성의 얼굴에 주름이 져도 괜찮았다. 고향에서는 젊음만이 유용한 것이 아니었다. 넌 고향에서 조너선을 만났다. 알프스에서 가까운 어느 숲이었다고 해두자. 숲 가장자리에 있는 어느 마을이었다고. 오래된 숲이었다고. 그때 넌 나이가 많지 않았다. 두 발로 치면 열네 살이었고, 네 발로 치면 고작 두 살이었다. 이미 완전히 성장하기는 했지만. 너희 종족은 네 발인 경우로 계산하면 두 살 정도에 완전히 성장하지. 그리고 알 건 다 알았어. 오, 맞아. 넌 달을 보고 짖는 법을 알고 있었어. 누군가 그에 화답해 짖을 땐 어떻게 ..
천선란 소설집 《어떤 물질의 사랑》 리뷰: 지울 수 없는 흑백 타투 같은, 2의 세계, 김창규 사변이 경계를 지워버리고 모든 장르가 서로 화기애애하게 구느라 바쁜 요즘, 글세계에서 작가의 색깔을 첫 모습과 주 종목으로 나누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천선란 작가는 2020년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에서 대상을 받았다. 한국과학문학상은 과학소설, 그러니까 SF 소설에 주는 상이다. 알다시피 작가를 알기 위해 그런 사실에 너무 집중하면 틀이 생긴다. 좋은 이야기를 찾아다니는 사람에게 틀은 아마도 도움보다는 해를 더 많이 줄 것이다. 피해를 받지 않으려면? 지금 당장 책을 열고 읽으면 된다. 하지만 조금 더 미적거리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 목차에서 이 작품집에 실린 8개의 글 제목을 잠시 들여다보면 적어도 세 개의 작품에서 하나의 숫자를 떠올릴 수 있다. 는 말할 필요가 없을 테고, 는 ‘나’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