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8년 봄, 프랑스의 경찰, 구스타프 고슈 경감은 신나는 일을 하나 맡게 된다. 정년퇴직까지 3년밖에 남지 않은 이 상황에, 연금 서열을 한 등급 올릴 수 있는 거대한 범죄를 수사하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그것도 호화로운 여객선, ‘리바이어던호’에 올라탄 채로 말이다.
그 사건이란 즉 이러하다. 파리에 있는 리틀비 경의 저택에서 그 하인들과 리틀비 경이 살해당하고 만다. 리들비 경은 귀중한 수집품들을 한가득 소장하고 있었고, 현장에서는 황금으로 된 시바 조각상과 스카프 하나가 도난품으로 신고된다. 여기서 의문이 더 깊어질 일이 하나 더 있다. 범행의 동기로 여겨졌던 황금 시바상은 강바닥에서 발견되고, 범인의 정체와 그 동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단서도 남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수사가 오리무중에 빠질 상황에, 고슈 경감은 현장에서 결정적인 단서를 하나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살해당하기 직전, 리틀비 경이 손에 쥐고 있던, 황금으로 된 고래 배지다. 조사 결과, 이 배지는 호화 증기선 리바이어던호의 일등석 승객과 선임 장교에게 지급된 기념품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고슈 경감은 동료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손수 리바이어던호에 올라타 황금 고래 배지를 차지 않은 인물들을 용의자로 삼아 수사를 계속하기로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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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슈 경감은 리바이어던호에 오른 뒤 용의자를 황금 고래 배지를 차지 않은 승객 네 명으로 좁히는 데 성공한다. 용의자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넋이 나간 듯 행동하는 귀족인 레지널드 밀포드스톡스 남작. 일본군 장교 긴타로 아오노. 은행원의 아내 르네 클레버. 영국 숙녀 클라리사 스탬프. 이 인물들은 국적도 다양하고 성격도 유별난 인물들로 모두 살인과 연결 짓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었다. 그럼에도 고슈 경감은 비밀리에 리바이어던호의 선장에게 요청하여 용의자들과 수사에 도움이 될 인원을 모아 윈저홀에서 지내도록 획책한다.
기대와 달리 수사에 진척이 없는 사이, 리바이어던호에 새로운 승객이 합류한다. 그 인물은 에라스트 P. 판도린, 바로 이 시리즈의 주인공이다. 그리고 고슈 경감은 그 또한 용의자가 될 수 있다면서 경계하는 태도로 접근하다 도리어 판도린에게 그 의도를 들킨 나머지, 본인이 비밀리에 살인자를 쫓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판도린에게 협조를 구하게 된다.
이야기는 곧 고슈 경감의 손을 떠나고, 각 용의자들의 시점이 번갈아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레지널드 밀포드스톡스 남작은 아내에게 쓰는 편지로, 긴타로 아오노는 기록으로 남겨놓는 일기로, 르네 클레버 부인과 클라리사 스탬프는 거리를 둔 묘사로 그들이 배에서 겪은 사건과 과거를 털어놓는 것이다. 동시에 이들의 이야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이 독자들에게 하나 이상의 비밀을 숨긴 채 진행된다는 것이다.
결국 이야기는 믿고 따라가기에는 엄벙덤벙한 면이 있는 고슈 경감과 의심스러운 구석으로 가득한 용의자들의 시점을 오가면서 독자들에게 혼란을 더한다. 무엇보다 이전 시리즈에서 멋지게 사건을 해결했던 시리즈의 주인공, 판도린조차 의뭉스럽게 상황을 관망하기만 한다. 그러니 독자들로서는 경중을 알 수 없게 쏟아지는 사건과 정보 속에서 표류하며 헤맬 뿐이다.
에라스트 판도린 시리즈는 작품의 시간적 무대가 되는 19세기의 혼란스러운 세계정세를 작품에 적극 반영하고는 했다. <리바이어던> 역시 역사 속 구체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삼지 않았을 뿐, 그 흐름은 계속 유지된다. 호화여객선이라고 하는 한정된 공간에 각국의 문화적 특성을 담은 등장인물들을 배치하여 전개되는 드라마를 통해서 말이다.
근대 유럽을 중심으로 제국주의와 식민지 수탈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열강 사이의 갈등이 깊어지고 이념과 현실이 충돌하는 난장판 속에, 배 위에서 벌어지는 소동극은 그 세계에 대한 축소판으로 작동한다. 그렇기에 각 등장인물이 서로에게 쏟아내는 적나라한 편견과 차별은 가끔 선을 넘어가기도 하지만, 당대에 실재했던 폭력에 대한 시대적인 한계로 다가온다.
‘그것은 솥의 물이 끓는 것처럼 바다를 휘저어 기름이 끓을 때처럼 거품을 일으키고, 그 뒤에는 광채 나는 길을 만들어 바다를 온통 백발처럼 보이게 한다. 세상 그 어느 곳에도 이 괴물처럼 두려움을 모르는 동물은 없다. 이 바다 괴물은 가장 거만한 동물도 얕잡아 보며 모든 교만한 짐승의 왕으로 군림한다.’
작품의 제목이자 무대가 되는 선박의 이름인 리바이어던은 성경 욥기에 나온 괴물의 이름이기도 하다. 또한 토마스 홉스의 저서명이기도 하다. 토마스 홉스는 이 책에서 리바이어던을 이기적이고 교만한 인간들의 각축전에 의해 역설적으로 탄생하게 된 권력의 상징으로 삼았다. 저자 보리스 아쿠닌이 이 상징을 제목으로 따온 이유는 토마스 홉스처럼,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다양한 욕망과 그로 인한 비극을 담기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제목도 없다 판단한 탓일 것이다.
<리바이어던> 안에서 등장인물은 서로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며 서로를 깔보고 의심하는 동시에 또 의지한다. 그리고 유일하게 이 복잡한 상황을 이성적으로 파헤칠 수 있는 판도린은 냉소적이고 거리를 두는 태도로 그 안에 녹아든다. 그 무기력한 태도에 다른 용의자들은 그를 얕잡아보는 동시에, 위협적인 대상으로 보지도 않는다. 시리즈의 전작을 읽은 독자들이 보기에는 헛웃음이 나올 이 착시는 곧 또 다른 재미로 이어진다.
전작까지 멋진 활약을 보여줬던 판도린이 이번만큼은 시니컬한 태도로 일관하는 것은, 이미 성장을 마친 완성형 캐릭터인 판도린이 독자들에게 스릴과 공포를 간직하도록 남겨둔 배려일 것이다.
원래 훌륭한 미스터리 소설은 크루즈를 타고 떠나는 유람 여행과도 같은 만족을 주는 법이다. 둘 다 지금 이곳과는 다른 곳으로 떠나, 일상 속에서는 접하지 못할 특별한 경험을 겪고 돌아오는 짜릿한 경험을 선사하니 말이다. <리바이어던> 또한 그런 즐거움을 주는 멋진 작품이다. 그것도 처음 만난 이방인들이 폐쇄된 유람선에 갇혀 서로를 조심스레 탐사하는 그런 긴장된 쾌감을 중심으로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판도린처럼 멋진 가이드가 함께 한다는 점에서 이만한 여행도 없을 터이다.
- 홍지운,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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