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 작가의 단편집에 들어갈 작품해설로 적절한 도입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 글에는 약간의 짜증이 담길 예정임을 밝힌다. 〈어션 테일즈〉에 수록된 인터뷰를 통해 윤이안은 문단에서 등단한 이후 그의 빼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오래도록 지면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당연한 결과다. 딱히 새삼스러운 일도, 놀랄 일도 아니다. 오히려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을 했다는 것부터가 신기한 노릇이다. 윤이안의 글은 ‘문단’에서 소화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의 글에서 읽히는 맑고 단단한 깊이를 보라. 어떤 이들에게 윤이안의 글은, 잡귀가 군자의 그림자를 보고 괴력난신인 스스로의 정체가 들통이 날까 두려운 나머지 꽁무니를 빼고 도망칠 때처럼, 그저 경외감을 불러일으킬 무언가지 않겠는가?
농담이나 비아냥이 아니다. 문단의 몇몇 이들은 그들의 지향점을 장르적인 우회로를 통해 달성하고자 했다. 그리고 나는 그들 중 어떤 이들의 글을 볼 때마다 상당히 짜증이 났다. 왜 삼십 대가 한참 전에 지난 사람들이 살부(殺父)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누군가를 작품 안에서 SF와 판타지 그리고 미스터리의 도구를 빌려 대리살해를 저지르고 있단 말인가? 하여간 참, 피비린내인지 지린내인지 불쾌할 따름이다만, 어쨌든 이런 걸 너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윤이안은 정말이지 설명 불가능한 괴물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니 윤이안의 오랜 방황도 필연적인 결과였을 것이고.
물론 서브컬쳐에서 살부의식을 담지 않은 작품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주류라면 모를까. 애초에 〈스타워즈〉 클래식 시리즈부터 그렇지 않은가? 다만 단순명쾌한 활극을 거쳐 비장한 영웅서사를 지나 최종적으로 타락한 아버지를 용서하고 구원하는 것으로 이 주제에 대한 명징한 답을 제시했다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을 뿐이다. 뭐, 〈스타워즈〉 클래식 시리즈와 같은 답을 내리지 않은 경우도 많지만 내가 제기하고 싶은 문제의식이 지워지진 않는다. 나는 의식적으로 퇴행에 빠진 경우라면 모를까, 살부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스스로가 너무 자랑스러운 사람들이 너무나도 버겁다. 왜 이렇게 멸망을 좋아하세요…. 왜 이렇게 다 죽여 다 죽이세요…. 좀비 영화의 B급 감성조차 못 되는 걸 뭐 대단한 이야기라도 된다는 듯이….
맞다. 나는 지금 너무나도 납작하게 해당 신을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윤이안 같은 작가가 이렇게 오래도록 자신이 머물 지면을 찾아 헤매어야만 했다는 살아 있는 증거가 있으니, 나의 분석은 납작하기는 해도 부당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어쨌든 우리는 살부의식에 도취되지 않고 다음으로 넘어가야만 한다. 프로이트가 〈토템과 터부〉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애도의 영역으로 건너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 애도는 윤이안의 글에 있어 핵심이기도 하다. 이별과 죽음 말이다. (단편집의 여덟 편이나 되는 수록작 중에 죽음의 이미지와 동떨어진 작품이 단 한 작품도 없으니 이 분석은 조금 손쉬운 결론이겠다.) 살부의식을 넘어서 애도로 이어지는 과정은 결국 계승과 수용을 위한 과정이다. 이 승인은 곧 타인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일상으로 돌아와 나의 죽음을 향하기로 다짐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윤이안에게는 현실의 비극을 똑바로 바라볼 힘이 있다. 기를 쓰며 노려보거나 무의식적으로 흘겨보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차분하게,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바라볼 힘 말이다. 이 단단한 힘은 누군가에게는 슬플 정도의 위로가 된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윤이안의 글을 읽었으면 하는 이유도, 윤이안의 글에서 많은 가치를 발견했으면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파울볼〉과 〈앨리스, 스탠드 업〉은 윤이안 식으로 풀어낸 아포칼립스다. 운석과 충돌하여 지구가 멸망할 위기를 앞두고서 뜬금없이 야구를 보러 가기로 하는 두 사람이나, 화장실에 갇혔다가 그 바깥세상은 지옥으로 바뀌었음을 알게 된 사람처럼 그가 그리는 멸망은 거창하지 않고 소박하다. 이렇게 세상이 바스러지는 모습은 재난의 손을 빌어서 현실을 박살 내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을 감추고자 하는 음습한 현실부정과는 한참 멀다. 무언가를 향한 증오도, 그 증오를 이기지 못해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좌절도 없는 것이다. 윤이안은 잔잔하게 파멸을 음미할 줄 아는 작가다.
〈세 번째 장례〉는 모든 사람들이 더미 신체로 기억을 이전하며 죽음을 지연하는, 죽음에 대한 관념이 바뀐 세계에서 딸과 어머니가 또 한 번의 죽음을 앞에 두고 바다로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며, 〈어릿광대를 보내주오〉는 큰이모의 장례식장에 유언을 따라 큰이모와 가까웠을 누군가의 목소리를 가진 인공지능 스피커를 들고 가게 된 ‘나’의 이야기다. 모두 장례식을 무대로 하는, 이 단편집의 성격을 잘 보여주며 또 가장 빛나는 작품들이다. 두 작품 모두 서늘한 죽음의 속에서 짙은 온기가 담겨 있으며, 장르라는 우회로를 통해 보다 직관적으로 죽음의 본질에 대해 고민한다.
그 외에 〈드림 레플리카〉와 〈유리수의 세계〉는 윤이안의 SF적인 세계관을 설계하는 솜씨를, 〈목 없는 기수〉와 〈뱀과 사다리 게임〉은 그가 SF만이 아니라 미스터리와 호러의 문법에도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이 작품들 역시 죽음이나 사후세계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죽음을 납득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차분하게 묘사하고 있다.
너무나도 멋진 단편집에 식상한 수식어를 붙여 민망하지만, 윤이안의 글은 서릿발에서 추위를 이기고 피어난 꽃을 닮았다. 서늘하고 아름다우면서 고고하다. 겉으로는 덧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무엇보다도 강인하고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윤이안은 오래 헤맨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짐작하기에 이 사람은 단 한 순간도 헤매지 않은 것만 같다. 그저 묵묵히, 주변의 냉소와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믿는 길을 따라가며 이렇게나 멋진 결과물을 내놓았으니 말이다. 그의 글에는 오랜 시련 속에서도 퇴색되지 않은, 놀라울 정도의 굳건함이 담겨 있다. 그리고 어쩌면 작가 스스로도 그 사실이 의아한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든다.
동료 작가의 단편집에 들어갈 작품해설로 적절한 마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여기에서도 약간의 투정으로 문단을 마치는 점을 양해해주시길 부탁드린다. 윤이안은 글을 진짜 잘 쓴다. 그러니까 부디 주변의 호응이 적었다거나 그의 장점을 부정하는 지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갔으면 좋겠다. 하지만 어차피 윤이안이라는 사람은 그렇게 해온 사람이고 그렇게 해나갈 사람이니 나의 이러한 요청은 애초에 별 의미가 없는 일이며, 이 작품해설 역시 아무런 의미 없는 혼잣말과 별 차이가 없는 셈이다.
— 홍지운,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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