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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마저도’ 맛보기 - 1) 모두가 땅에 앉아 있었는데

아작 책방/04 여왕마저도

by arzak 2016. 1. 29.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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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니 윌리스는 작품을 한편 한편 읽어나갈수록 더 매력이 있는 작가 같습니다. 출판사로서는 더 많은 독자분들에게 이 사람의 매력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사람에게 중독된 독자들은 주욱 다음 작품도 따라오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없지 않습니다. 


‘코니 윌리스 걸작선 2’라는 타이틀이 붙은 <여왕마저도>는 원래 미국에선 한 권으로 나왔던 <The Best of Connie Willis>가 한국에선 분권되어서 나왔기에 <화재감시원>가 나뉘어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왕마저도>에 실린 작품들의 매력은 <화재감시원> 수록작 못지 않습니다. 2권이 1권만큼 안 팔리는 출판계 풍토가 아쉬울 지경입니다. 오늘은 그중 첫 번째 수록작인 <모두가 땅에 앉아 있었는데>를 소개하려 합니다. 무려 ‘본격 외계인’ 이야기입니다. 힐러리가 로스웰 사건 조사를 공약하고 CIA가 외계인 관련 발표를 하는 시대, 하지만 코니 윌리스가 출동해서 외계인 얘기를 한다면 어떨까? 시동 들어갑니다. 



나는 외계인이 지구에 실제로 착륙하면 실망스러울 거라고 항상 말해왔다. 외계인으로서는 영화 <우주 전쟁>과 <미지와의 조우>, <E.T> 이후로 대중의 머릿속에 박힌 외계인 이미지에 부응할 방법이 없다는 의미다. 그게 좋은 이미지든, 나쁜 이미지든 간에.


또한 나는 실제 외계인은 영화에 나오는 외계인과 전혀 다를 것이라고 말해왔다. 외계인은 A) 우리를 죽이려거나 B) 우리가 사는 행성을 차지해 우리를 노예로 삼으려거나 C) 영화 <지구가 멈추는 날>에서처럼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구하려거나 D) 지구 여성과 섹스하려고 오지는 않을 것이다. 괜찮은 사람을 찾기가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설마 데이트나 하려고 외계인이 수천 광년을 여행해서 오겠는가? 더구나 그들은 지구 여성이 아니라 멧돼지나 실난초, 심지어 에어컨에 오히려 더 매력을 느낄 수 있다. 


항상 난 A)와 B)는 거의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제국주의적 침략자들은 근처에 있는 행성을 침략하거나 다른 침략자에게 침략당하느라 바빠서 지구처럼 오지에 있는 행성까지 욕심낼 경황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긴 그거야 모르는 일이다. 이라크를 보라. 그리고 C)로 말하자면, 나는 트레셔 목사처럼 우리를 구하러 왔다는 사람이나 외계인을 경계한다. 그리고 몇 광년 거리의 우주여행을 하는 데 필요한 우주선을 만들 만한 외계인이라면 복잡한 문명을 가지고 있을 게 분명하므로 워싱턴을 불사르거나 가정집에 전화하는 일보다는 복잡한 동기를 가지고 왔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외계인이 지구에 착륙할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도 못했다. 게다가 9개월이나 그들에게 말을 걸고도 무슨 동기로 왔는지 알아내지 못하리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못했다.(p23-24)  



코니 윌리스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SF 설정을 끌어올 때에도 지금 이 시점의 배경을 잘 활용합니다. <화재감시원>의 수록작 <내부 소행>에서 은퇴한 여배우로 설정된 힐디는 대놓고 벤 애플랙이 싫다고 말할 정도죠. 또한 그녀는 다른 작가들에 비해 헐리우드 영화들에 대한 애착이 큰 것 같습니다. <모두가 땅에 앉아 있었는데>의 도입부도 그 점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 소설의 재미있는 점은 코니 윌리스적인 특징들이 이야기 초반에 잘 드러난다는 겁니다. 다음을 읽어보죠.



알타이르인들은 착륙 후 3주 내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얼굴 표정만 아니었다면 사람들은 알타이르인들을 식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식물들은 그런 식으로 노려보지 않는다. 사람을 기죽이는, 철저하게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그런 표정을 직접 봤던 것은, 맙소사, 쥬디스 고모의 얼굴에서였다. 


쥬디스 고모는 사실 아버지의 고모였다. 고모는 한 달에 한 번 꼴로 정장을 입고 모자를 쓰고 흰 장갑을 낀 모습으로 우리 집에 들러 의자 끝에 걸터앉아 우리를 노려봤다. 그 눈빛 때문에 엄마는 쥬디스 고모가 온다는 것을 알게 될 때마다 발작적으로 청소를 하고 빵을 구웠다. 쥬디스 고모가 엄마의 살림 실력이나 요리 솜씨를 비난했다는 말이 아니다. 고모는 비난하지 않았다. 고모는 엄마가 대접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실 때도, 먼지가 있는지 보려고 흰 장갑을 낀 손가락으로 벽난로 위 선반을 쓰윽 만질 때도 얼굴을 찌푸리는 법이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엄마가 고모와 대화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중에도 고모는 냉랭한 침묵을 지키며 앉아서 못마땅한 감정을 온몸으로 드러냈다. 그 노려보는 눈빛을 보고 있자면, 고모가 우리를 깔끔하지도 않고 매너도 없고 무식하며 경멸할 가치조차 없는 사람들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고모는 절대로 무엇 때문에 불쾌한지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가끔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은 아이들은 말하라고 할 때까지는 함부로 말하지 않아!”라고 이야기했던 걸 빼고는), 엄마는 미친 듯이 은식기를 닦아서 윤내고 프티푸르(작은 케이크나 쿠키―옮긴이)를 굽고, 트레이시 언니와 나에게 풀 먹인 긴 앞치마를 억지로 입히고 에나멜 구두를 신기고, 쥬디스 고모가 우리에게 생일 선물(1달러짜리 지폐가 들어있는 카드)을 주시면 예의바르게 감사 인사를 하라고 명령했고, 집안 구석구석을 문질러 닦고 먼지를 털었다. 엄마는 심지어 거실 전체를 다시 꾸미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쥬디스 고모는 여전히 경멸감을 발산했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그런 태도가 계속 되면 진이 빠지기 마련이다. 엄마는 쥬디스 고모가 다녀가시고 나면 이마에 차가운 수건을 얹고 드러눕는 일이 잦았는데, 알타이르인들은 그들을 보러 왔던 고위 인사와 과학자, 정치인들에게 똑같은 효과를 일으켰다. 그들을 처음 만난 다음, 주지사는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했고, 지지율이 이미 20퍼센트 초반까지 내려가서 격분한 시민들의 모습에 지친 대통령도 알타이르인들을 절대로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p27-28) 





외계인의 행동을 어린 시절 겪은 친척 어른의 행동과 포개는 발상, 대단히 코니 윌리스적인 전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분명히 SF적인 소재를 사용하고 있는데도 뭔가 SF가 아닌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또한 코니 윌리스는 이렇게 얘기를 한 번 포개면 끝까지 그 설정을 잘 우려내어 버무리는 작가죠. 그냥 겉보기엔 대단한 차림이 아닌 비빔밥인 거 같은데 떠 먹으면 엄청 맛있어! 이것이 코니 윌리스의 소설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 대신 대통령은 알타이르인에 대해 연구하고 그들과 의사소통할 방법을 찾기 위해 국방부와 국무부, 국토안보부, 하원, 상원, 그리고 연방재난관리청 대표들로 구성된 초당파적인 위원회를 설립했는데, 그 위원회가 실패하자 천문학과 인류학, 우주 생물학, 소통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두 번째 위원회를 만들었지만, 그것도 실패하자 세 번째로 누구든 그들이 끌어 모을 수 있는 사람들과 알타이르인에 대한 이론이나 그들과의 의사소통 방법에 대한 이론 비슷한 같은 것들을 만든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꾸렸다. 그곳이 바로 내가 속하게 된 위원회다. 나는 알타이르인의 착륙 전후로 외계인에 대한 칼럼을 신문에 연재했었다(나는 그 외에도 관광객 문제, 운전 중 휴대폰 사용 문제, I-70의 교통 체증 문제, 데이트할 좋은 남자 구하기가 힘들다는 문제, 그리고 쥬디스 고모에 대해서도 칼럼을 쓴 적이 있다).


나는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며 위원회를 그만둔 언어 전문가를 대체하기 위해 11월 말에 채용되었다. 나를 채용한 사람은 위원장이었던 모스맨 박사였지만(박사는 내 칼럼이 익살스러운 농담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그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모스맨 박사는 내 말이건 다른 위원들의 말이건 귀 기울여 들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p28-29)


이쯤 읽다 보면 3단콤보가 들어간 느낌입니다. 외계인의 등장을 영화에 포개 설명하고, 외계인들의 기이한 행동을 어린 시절 겪은 친척 어른의 행동에 포갠 코니 윌리스는, 큰 이야기를 자잘하게 시작하는 듯 했지만 현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안다는 듯이 관료들의 행동을 설득력 있게 묘사합니다. 외계인의 등장을 냉소적으로 묘사한 한 여성 칼럼니스트가 위원회에 들어가게 된 이유도 설명이 되지요. 이제 판은 깔아졌고 굿판이 어떻게 벌어지는지를 봐야 할 때입니다. 



내가 위원회에 합류했을 무렵 위원들은 우리 엄마가 거실을 완전히 다시 꾸몄을 때처럼 필사적인 상태가 되어, 알타이르인들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는 기대를 품고 덴버와 콜로라도 관광을 통해 그들을 감동시켜보기로 결정했다. 


“소용없을 거예요.” 내가 말했다. “저희 어머니는 커튼을 새로 달고 벽지까지 새로 바꿨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어요.” 하지만 모스맨 박사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p32) 


한 번 포개면 계속 포갠다는 얘기가 틀리지 않죠?



그래서 우리가 쇼핑몰에 갔던 그 날도 일행이라고는 모스맨 박사와 아로마 전문가인 와카 무라 박사, 트레셔 목사, 그리고 나뿐이었다. 언론매체 하나 동행하지 않았다. 알타이르인이 처음 착륙했던 날에는 모든 TV 방송국과 CNN이 그들을 다뤘지만, 외계인들이 몇 주가 지나도록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자 방송국들은 <에이리언>과 <우주의 침입자>와 <맨 인 블랙 II>에 나오는 훨씬 흥미진진한 장면들을 보여주기로 방향을 틀었다가 나중에는 외계인에 완전히 흥미를 잃고 패리스 힐튼과 좌초된 고래 이야기로 돌아갔다.(p33)


이제는 배경설명이 끝났고 뭔가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그때 갑자기 헉 하는 소리와 함께 쇼핑몰이 일제히 조용해졌다. 들리는 건 뮤잭 소리뿐이었다. “이게 도대체…?” 모스맨 박사가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기 위해 남자애들을 밀치고 나아갔다.


알타이르인들이 매장들 사이에 있는 널찍한 공간 한복판에 조용히 앉아서 노려보고 있었다. 이 광경에 매료된 쇼핑객들이 둥그렇게 그들을 에워쌌고, 쇼핑몰 관리자인 듯 보이는 정장 차림의 남자가 허겁지겁 달려와 따져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굉장해.” 모스맨 박사가 말했다. “여기저기로 데리고 다니면 언젠가 반응할 줄 알았어.” 박사가 나를 돌아봤다. “예이츠 양은 알타이르인들 뒤쪽에 있었지? 저들이 무엇 때문에 앉은 거야?”


“잘 모르겠어요.” 내가 말했다. “제가 있던 자리에서는 알타이르인들이 보이지 않았어요. 혹시…?”(p35)


그냥 앉았답니다. 하지만 이제껏 따라다니면서 노려보기만 했던 외계인들이 갑자기 쇼핑몰에 철퍼덕 주저앉았다니 그 이유를 알아내야겠죠. 그들과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라면요.



나는 모스맨 박사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었는데, 박사는 쇼핑몰 관리자에게 쇼핑몰 이쪽 끝을 차단하고 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격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다요?” 관리자가 화를 누르며 말했다. 


“당연하지. 반드시 그래야 하오. 알타이르인들이 반응하는 것은 분명히 저들이 보았거나 들었거나….”


“냄새로 맡았던 거죠.” 아로마 전문가 와카무라 박사가 끼어들었다. 


“그래서 그게 무엇인지 우리가 알아내기 전까지는 아무도 이곳을 떠날 수 없어.” 모스맨 박사가 말했다. “그게 뭔지 알아내야 우리가 알타이르인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크리스마스까지 2주밖에 안 남았어요.” 쇼핑몰 관리자가 말했다. “그렇게 간단히 쇼핑몰을 봉쇄할 수 있는 상황이….” 


“지구의 운명이 위기에 처했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군.” 모스맨 박사가 말했다.(p36-37)


조사야 이렇게 하겠죠. 그리고 이 중차대한(?) 순간에 타이밍 좋게 남자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알타이르인들의 노려보는 눈을 무시하고 모두 휴대폰을 꺼내 그들을 찍고 있었지만, 당시 상황을 녹화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기 때문이다. 나는 빙 둘러서 있는 쇼핑객들을 훑어보며 행여 어느 부모나 할머니, 할아버지가….


성가대. 그 여자애들의 부모 중에는 분명 비디오카메라를 가져온 사람이 있을 게 틀림없었다. 나는 서둘러 초록색 성가대복을 입은 소녀들에게 다가갔다.


“애들아, 있잖아.” 내가 아이들에게 말했다. “난 알타이르인들이랑 같이 온 사람인데….”


실수였다. 아이들은 곧장 나에게 질문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왜 외계인들이 앉아 있어요?”

“왜 말을 안 해요?”

“왜 계속 화를 내고 있어요?”

“저희 노래하나요? 아직 노래 못 불렀어요.”

“저분들이 우리더러 계속 여기에 있어야 한대요. 얼마나 있어야 해요? 저흰 6시에 플랫아이언 몰에 가서 노래해야 해요.”

“저 외계인들이 우리 몸속으로 들어가서 배를 뚫고 나오나요?” 

“혹시 너희 부모님 중에 비디오카메라 가지고 오신 분 계시니?” 나는 쏟아지는 질문들 사이로 목소리를 높여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너희 지휘자 선생님이랑 이야기를 해야겠다.” 

“레드베터 선생님이요?”

“언니가 선생님 여자 친구예요?”


“아니.” 나는 성가대 지휘자처럼 생긴 사람을 찾으려고 애를 쓰며 말했다. “어디 계셔?”


“저기 계세요.” 한 아이가 캐주얼한 바지와 상의를 입은 키가 크고 마른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희 레드베터 선생님이랑 사귈 거예요?”


“아니.” 나는 그가 있는 쪽으로 가려고 발길을 돌리며 말했다.


“왜요? 정말 괜찮은 분이에요.”

“언니는 남자 친구 있으세요?”


“아니.” 나는 지휘자에게 다가가면서 말했다. “레드베터 씬가요? 저는 멕 예이츠라고 합니다. 알타이르인에 대해 연구하는 위원회에서 일하고 있는데….” 

“바로 제가 이야기하려고 찾던 사람이군요.” 그가 말했다.(p37-39)


성가대 지휘자 레드베터와 칼럼니스트 멕은 무능한 위원회 속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요? 너무 길어져서 이만 줄여야 하겠습니다만, 아직도 코니 윌리스가 이 소설에 깐 설정들을 다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이 소설은 크리스마스 캐럴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성가대 지휘자가 굳이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죠. 지구의 운명을 결정할 외계인과의 의사소통은 쥬디스 고모에 대한 기억과 캐럴 가사집에서 결정될 것입니다. 코니 윌리스는 후기에서 이렇게 쓰고 있죠. 



이 이야기는 내가 30년 동안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했던 경험에 의존해 쓴 것이다. 그 기간 동안 나는 이제까지 쓰인 크리스마스 캐럴이란 캐럴은 다 불러봤고, 내가 알고 싶었던 이상으로 캐럴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p146)       


겨우 125페이지 남짓한 분량으로 당신을 울고 웃기고 감동을 줄 소설, 이상 <모두가 땅에 앉아 있었는데> 맛보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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