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토크 vs 이터널 선샤인
칼리 코트니. Sci-fi Addicts. 2016.10.04
다행스럽게도 SF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코니 윌리스가 근미래를 배경으로한 SF, 크로스토크와 함께 돌아왔다. 미국 SF/판타지 작가 그랜드 마스터를 달성하고 수 많은 영예로운 상들(7개의 네뷸러상과 11개의 휴고상을!!!)을 수상한 코니 윌리스는 현대 사회를 좀먹고 있는 — 핸드폰, SNS, 뇌수술을 통한 — 정보 과잉을 통찰력 있게 그려낸다. 아침에 뭘 먹었는지 SNS에 올려두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지는 시대에 걸맞게, SF 크로스토크는 근미래에 살고 있는 브리디를 따라간다. 새로 나온 시술 중 하나는 사랑하는 상대방과의 공감 능력과 친밀도를 높여준다고 광고를 한다. 곧 약혼자가 될 트렌트가 브리디에게 이 시술을 한번 받아보자고 했을 때 브리디는 망설이지 않았다. 사귄지 6주 밖에 되지 않았지만 “완벽한” 커플이 된 이들은 병원에 찾아가 시술을 받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인간 관계와 인간의 감정에는 그녀가 생각했던것 보다 훨씬 복잡한 무엇인가가 숨어 있음을 알아채게 된다. 그리고 대체로 그렇듯, 시술 후의 삶은 예상치 못한 경로를 통해 최악에서 최악으로 치달아간다.
크로스토크와 이터널 선샤인을 비교하며
2004년에 나온 미셸 공드리 감독/각본의 SF 영화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은 <크로스토크>와 좋은 쌍을 이룬다. 아직 짐 캐리 최고의 영화를 보지 못한 분들을 위해, 줄거리는 이렇다. 멀지 않은 미래, 사람들은 간단한 시술을 통해 머리 속에서 특정 사람에 대한 모든 기억을 지워버릴 수 있다. 그리고 대체로 그 대상은 아주 나쁜 결별을 겪은 애인에 대한 것이 된다. 조엘(짐 캐리)의 여자친구인 클레멘타인은 결별을 선언한 뒤 그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린다. 그리고 조엘도 이에 대한 복수심으로 그녀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린다. 조엘에게는 불행히도, 시술을 받는 중간 무의식 속에서 그녀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마찬가지로 브리디 역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의 매력은 바로 상대방이 타인이기 때문이며, 타인의 마음이라는 미스테리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크로스토크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두개의 별로 연관이 없어 보이는 SF 로맨틱 코미디가 우리에게 경고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엿같은지? 뭐, 벌써 경험을 통해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그러니 그 보다는 뭔가가 좀 더 있을 것 같다. 내 생각에 코니 윌리스와 미셸 공드리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관계가 만들어져가는 과정이나, 혹은 무너져내려가는 과정에서나 사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일정한 거리는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누군가를 삶에서 완전히 지워버리거나 텔레파시를 가능하게 하는 수술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은 당신이 말하는 것 뿐 아니라 당신의 마음 속에 있는 것들을 되돌아 보는 것으로 규정된다. 그래서 크로스토크에서 코니 윌리스는 독자들에게 SF와 유머를 통해 피상적인 공감을 강제하는 것이 무관심만큼이나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이야기 한다. 합의 없이 누군가를 기억에서 사라지게 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끊임없이 그 생각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클레멘타인이 조엘에게 그랬던 것 처럼. 브리디가 시술 중 트렌트가 아닌 다른 사람과 사고로 엮어지게 된 데서도 관계에 같은 영향을 받는다. 그녀의 마음 속에 현실과 선택에 대한 어떠한 공간도 남아 있지 않고 타인의 생각 속에 잠겨 버리는 과정은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들의 마음 속에서 누군가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 혹은 과도하게 커지는 과정 속에서 주인공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조차 잃어간다. 이러한 현상들은 크로스토크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삶과 마음을 모두에게 완전히 개방해 버린다면, 타인들이 떠나가 버린 뒤 개인으로서의 당신은 무엇이 남을 것인가?
왜 사회적 현상을 보기 위해 SF를 쓰는가?
이러한 메세지를 전하기 위해 SF를 매개체로 쓰는 방법의 장점은, 독자들이 이런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충분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동시에, 줄거리와 주인공에 이입하기 적당한 친밀감을 주기 때문이다. 코니 윌리스는 마치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타인의 감정과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장치를 삽입하는 수술처럼, 우리가 등장인물들에 이입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터널 선샤인의 세상은 그 어느때 보다도 쉽고 고통 없이 타인과 단절할 수 있지만 그만큼 서로와 연결되기 힘들어한다. 이 두 이야기 모두 같은 결론으로 이어진다. 세상에 간단한 것은 없다. 더불어 두 SF 모두 주인공들에게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그들의 모든 부분부분들의 합을 받아들이는 것임을 가르쳐준다. 나쁜 부분, 좋은 부분, 그리고 미지의 부분까지도.
영국 '사이파이나우' 리뷰: 코니 윌리스 신간 <크로스토크> (0) | 2016.10.16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