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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SF 완전사회. 9] 떠난 자와, 남아 있는 자 by 박해울

아작 미디어

by arzak 2021. 1. 25.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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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자와, 남아 있는 자

 

SF 장르에서 낯설지 않은 서사 중, ‘지구를 떠나는 인류가 있다. SF 소설이나 영화에서 인류가 지구를 떠나, 낯선 행성이나 우주 공간으로 향하여 모험을 떠난다. 이들은 신세계의 하늘 아래에서 외계생물과 싸우기도 하고, 그곳에서 뿌리를 내려 독특한 문화를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버려진 지구에 남겨진 인류의 서사 또한 위의 서사 만큼이나 무궁무진하게 많다. 지구에 남겨진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분투한다. 파벌로 나뉘어 싸우며 첨예한 갈등을 빚기도 하고, 연대하고, 지금까지 보지 못한 세계를 만든다.

 

SF는 다가올 미래를 보여주며, 현존하는 과학기술의 진보로 인해 화려하고 새로운 세계를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SF가 보여주는 본질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SF의 본질은, 어떤 과학기술이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을 때 그 삶과 사회의 변화 양상을 지켜보는 데에 있다.

 

*

 

노벨상 수상 작가인 일본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는 1990년에 치료탑치료탑 행성을 발표하는데, 그가 SF를 썼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 두 소설은 세계관을 공유한다. 가까운 미래, 지구는 방사능과 환경오염, 자연재해로 고통받는다. 그리고 동시대에, ‘새로운 지구가 관측되어 사람들은 이주를 결심한다. 그러나 모든 자가 갈 수는 없어 중요하고 유능한 인물 100만 명만이 선발된다. 선발은 누가 했는지 알 수 없고, 소리소문없이 정해진다. 선택받은 자는 우주 선단에 소속되어 새 땅으로 떠난다. 지구에 남겨진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받지 못했다는 열패감을 마음속에 새긴다. 그 와중에도 지구는 점점 오염되어가고 몰락의 길을 걷는다.

 

그러나, 10년 만에 새로운 세계로 떠났던 사람들은 조용히 지구로 돌아온다. 우주 선단이 지구 전역에서 몇천 갈래 로켓 구름을 남기고 일제히 발사되는 극적인 광경은, 회상으로만 나타날 뿐 본분에서 구체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선택받은 자들이 지구를 떠나는 날이 아니라, 귀환 장면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것은 이 소설이 보여주고자 하는 주제를 함축적이고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이야기는 지구를 떠났던 자와 오염된 지구에 남겨진 자가 한데 섞이게 되면서 사회에 어떤 갈등 양상이 전개되는지 보여준다. 남겨진 사람 중에는 우주선이 출발하지 못하게 막았던 저항운동가도 있고, 선택받지 못한 지식인도 있으며 혼란의 시기에 폭행을 당한 피해자도 있다. 다양한 사연을 가진 자들은 사회적 대변혁을 맞으며 개인이 어떤 생각과 선택을 하는지 자세히 나타낸다.

 

떠났던 자들은 돌아와서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지구로 돌아와서도 남아있는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소통을 시도하지 않고 자신들끼리만 통용되는 시스템과 언어 방식으로 의사소통한다.

 

새로운 지구를 경험한 사람은 치료탑이 거기 있었다고 말한다. 탑에 들어가면 암과 에이즈 등 회복하기 힘든 병에 걸리거나 심하게 다친 사람들도 한 번 들어가기만 하면 멀쩡하게 낫는 기적의 장치다. 치료탑은 병에 걸린 사람이 사용하는 것이 이상적이나 인류는 이 장치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작중의 사람들이 결국 그 치료탑을 어떻게 이용하는가를 깨닫게 되면, 자조적인 미소를 띠며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고찰을 해보게 된다.

 

미래는 우리 손에 달려 있다. 이처럼 치료탑 행성은 우리에게 미래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치료탑 행성은 미래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이지만 한편으로는 과거나 현재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지구로 떠났다가 돌아오는 선택받은 자와, 남아 있는 자는 우리 현실에도 엄연히 존재한다.

 

SF는 대부분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미래는 어느 방향에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을까? 나는 미래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시간에서 달려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내려오고 있다고 느낀다. 자본주의 시대가 계속되는 이상, 새로운 과학기술과 지식은 돈과 권력을 쥐고 있는 기득권층에서 가장 먼저, 가장 편리하게,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다. 이들은 미래의 문물을 누구보다 빨리 접하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 아래 있는 사람은 기술을 접하는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다. 그 아래, 더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기술이 있는 줄도 모르고 기득권층과 같은 시간을 살아간다.

 

요즘 사회를 보면 계층은 변화 없이 굳어지고, 각 계층에 있는 사람들은 다른 계층이 있는지도 모르고 시야만 좁아지는 것 같다. 기술과 정보 교육 격차는 점점 더 심해진다. 수도권 집값은 계속 오르고, 지방의 작은 마을은 빈집만 남기고 사라진다. 코로나 유행 시기의 교육은 점점 더 그 틈이 벌어져 평균 학업 성취도까지 낮아지고 있다. 기후 위기로 인하여 어떤 사람들은 조상의 조상 때부터 살았던 땅을 떠나야 한다.

 

나는 이러한 사회 현상이 미래로 가면 갈수록 크게 벌어지지 결코 줄어들 거라고 보지 않는다. 우리 주변의 기술이 아무리 진보해도, 사람의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살아있는 인간과 인간이 모인 사회에 대해 말하는 것이 바로 SF.

 

사람들은 SF를 앞에 두고 말한다. ‘이 작품은 SF가 아니라 SF의 외피를 뒤집어쓴 철학적인 소설이라고. 하지만 아니다. SF는 원래 그런 장르였다. SF항상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사람에 사회에 대해 말해왔고,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다.

 

 

 

박해울, 소설가

 

단국대학교에서 문예창작 학사와 석사를 전공하였다. 대학 재학 중인 2012년에 <계간문예> 소설부문 신인상을 수상하였으며, 기파 2018년 제3회 과학문학상 장편소설 부문 대상을 수상하였다. 누전차단기와 PE 밸브를 만드는 회사에서 일했으며, 현재는 사회복지사로 활동하고 있다. 캐릭터와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따라가며 즐길 수 있으면서도, 책장을 덮고 나면 현실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는 글을 쓰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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