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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망상을 유지해"

아작 책방/01 리틀 브라더

by arzak 2015. 9. 1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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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브라더>(거듭 말씀드립니다만 한국어판 제목은 달라질 수 있어요)에 나오는 인상적인 말 중 하나가 ‘피해망상’입니다. 다들 직관적으로나마 뜻을 알고 있는 단어죠? 건강백과를 뒤져보니 “피해망상(persecutory delusion)이란 각종 정신병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망상의 종류이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시달리고 있거나 속았거나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그릇된 신념이다. 피해망상의 흔한 내용으로는 남이 자기를 미행한다거나, 자기를 죽이기 위해 음식에 독을 탔다거나, 남이 자기를 감시하고 있다거나, 특수한 기계를 이용하여 자신의 능력을 감소시키고 있다거나, 자기 몰래 자신의 몸 속에 어떤 장치를 했을 것이라는 생각 등이 있다”(서울대학교병원 의학정보, 서울대학교병원)라고 합니다. “피해망상을 증상으로 보이는 질환으로는 조현병(정신분열병)이 가장 흔하며, 양극성 장애(조울증), 우울 장애, 망상 장애, 각종 치매, 뇌의 손상 또는 질병으로 인한 기질성 정신 장애에서도 나타난다”라고 하네요.


하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고 이 소설에도 나오는 ‘피해망상’이란 어휘는 대체로 이러한 정신병 증세를 가리키는 말은 아니죠.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피해망상적’ 태도를 보인다고 비난하곤 합니다. 그런데 본작 <리틀 브라더>에선 정부와 싸우는 등장인물들이 ‘피해망상적’ 태도없이는 삶을 헤쳐나갈 수 없겠다고 느끼는 장면들이 거듭 등장합니다.


소설 본문에서 ‘피해망상’이란 단어는 총 10번 쓰이고 있으니 분량을 생각하면 많이 나오는 편은 아니에요. 그럼에도 소설을 읽고 나면 이 말이 입에 붙게 되죠. 그러면 ‘피해망상’이란 말이 사용된 그 구절들을 한번 감상하도록 할까요?  


(‘피해망상’을 굵은 글씨로 바꾼 것은 편집자) 


1장 


(...) 난 걸음걸이를 평소대로 유지하면서 복도를 따라 가볍고 힘차게 걸어갔으므로 보조인식 카메라에 그대로 기록됐을 것이다. 이 카메라는 1년 전에 설치됐는데, 나로서는 학교의 이 순

전한 바보짓이 그저 사랑스러울 뿐이었다. 그 전에는 얼굴인식 카메라로 학내 거의 모든 공공장소를 뒤덮었던 적이 있었는데, 법원에서 학내 얼굴인식 카메라 사용에 위헌 판정을 내렸다. 그러자 피해망상증에 걸린 프레드릭 교감과 학교 관리자들은 걸음걸이로 학생들을 식별할 거라며 이 멍청한 카메라를 사들이는 데 학교 예산을 썼다. 해 보라지, 뭐. (...) 


: 이처럼 처음에는 주인공 마커스가 자신을 감시하려는 학교의 관리자들의 태도를 욕하는 단어로 사용이 됩니다.


4장 


(...) 여자가 새침한 미소를 살짝 비쳤다. 그 미소는 아마도 이 얼음 여왕에게 일종의 골 세리머니임이 틀림없었다. 그러자 경비원이 나를 데리고 나갔다. 문이 닫힐 때 여자가 휴대폰 위로 고개를 숙이고 비번을 입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 가능성을 미리 예상해서 휴대폰에서 완전히 무해한 파티션을 열어주는 가짜 비번을 미리 만들어 놓았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당시까지는 내가 그 정도로 피해망상적이거나 영리하지 않았다. (...)


: 국토안전부에 잡혀간 마커스가 좀더 피해망상을 가지고 살 걸 그랬다고 후회하기 시작하죠.


5장 

 

(...) 이 장치를 이용하면 가장 간단하게 몰카를 찾아낼 수 있다. 몰카는 렌즈가 아주 작지만 악마의 눈처럼 빛을 반사한다. 어두운 방일수록 잘 작동하는데, 휴지심을 통해 벽과 주변을 느리게 훑어보면 반사된 빛이 반짝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상태에서 옆으로 움직였는데도 계속 그 빛이 반사된다면 렌즈일 가능성이 높다.


내 방에 카메라는 없었다. 적어도 내가 발견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물론 더 나은 카메라나 음성도청 장치가 있을 수 있다. 어쩌면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나를 피해망상이라고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


: 국토안전부의 감금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온 마커스는 자신이 피해망상을 가지고 살아야 할 지경에 처했다고 자각하기 시작합니다. 


8장 


(...) 하지만 아빠는 나를 더 미치게 만들었다. “마커스, 넌 피해망상이야.” 며칠 후 아침밥을 먹다가 전날 지하철역에서 경찰이 사람들 몸수색하는 모습을 봤다는 이야기를 하자 아빠가 그렇게 말했다. “아빠, 이건 웃기는 짓이에요. 테러리스트는 한 명도 못 잡았잖아요. 잡았나요? 이건 그냥 사람들을 겁주는 것밖에 안 돼요.”


“아직은 테러리스트를 못 잡았을지 몰라도 거리의 불량배들은 확실히 없앴잖아. 마약상 봐라. 경찰이 그런 방식으로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벌써 수십 명을 잡아넣었어. 마약쟁이가 너한테 강도질했던 거 기억 안 나? 마약을 파는 놈들부터 없애야 돼. 그러지 않으면 더 나빠질 거야.” (...)


: 네, 국가와 경찰을 비난하다가 아버지로부터 피해망상이란 공격을 받는 마커스죠. 


9장 


(...) 

> 어디야?


내 태엽을 감아준 리자네이터는 여성 캐릭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캐릭터의 주인도 여성이라는 법은 없었다. 이상하게 여성 캐릭터로 게임하는 걸 좋아하는 남자애들이 종종 있었다.


> 샌프란시스코


내가 답했다.


> 말도 안 돼. 샌프란시스코 어디?

> 왜, 너 변태야?


보통 때라면 대화를 중단했을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게임 공간에는 소아성애자와 변태들, 그리고 그런 놈들의 미끼 역할을 하는 경찰이 가득하다. 부디 엑스넷에는 경찰이 없길 바라지만 말이다! 아무튼 저렇게 비난을 하면 십중팔구는 대화 주제를 바꿨다.


> 미션 지역? 포트레로 힐? 노에? 이스트 베이?

> 그냥 태엽이나 감아줘. 고마워.


지라네이터가 태엽을 감다가 멈췄다.


> 겁먹었니?

> 괜찮아. 무슨 상관이야?

> 그냥 궁금해서.


이 캐릭터에게서 안 좋은 기운이 느껴졌다. 확실히 궁금한 수준 이상이었다. 피해망상이라고 불러도 좋다. 나는 로그아웃하고 엑스박스의 스위치를 내렸다. (...)


: 게임을 하다가 신변의 위협을 느끼는 마커스죠.


10장 


(...) 하지만 보안을 좀 더 깊게 이해하고 싶다면 가장 피해망상적인 가능성까지 고려해야 한다. (...)


: ...그렇다고 합니다.  


13장


(...) 내 받은 편지함에는 사람들이 보낸 여러 가지 제안들로 넘쳐 흘렀다. 사람들이 휴대폰과 똑딱이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을 보냈다. 그때 익숙한 아이디가 보낸 이메일을 받았다. 닥터 이이블(Dr. Eeevil, e가 세 개나 된다)은 패러노이드 리눅스를 개발한 주요 개발자 중 한 명이었다.


> 마이키에게.

> 네가 진행하는 엑스넷 실험을 아주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어. 독일에 사는 우리는 정부가 통제를 벗어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잘 알지.

> 모든 카메라는 고유한 ‘노이즈 지문’을 남기기 때문에 나중에 카메라와 대조해볼 수 있다는 사실을 네가 알았으면 해. 즉 사진을 찍은 사람들이 다른 일로 걸렸을 경우 네가 그 사이트에 올린 사진들이 그 사람을 식별하는 데 이용할 수 있어.

> 하지만 다행히 네가 조금만 더 신경 쓰면 노이즈 지문을 쉽게 지울 수 있어. 네가 사용하는 패러노이드 배포판에 보면 지문을 지울 수 있는 유틸리티가 있어. ‘익명사진’이라는 프로그램인데, /usr/bin에 들어가면 있을 거야. 설명서 읽어봐, 아주 간단해.

> 네가 하는 일이 잘 되길 바랄게. 잡히지 마. 자유를 지켜. 피해망상을 유지해.

> 닥터 이이블. (...)


: 이젠 타인도 마커스에게 피해망상을 유지하라고 하죠.


16장 


(...) “혹시 엑스박스 가지고 계시나요? 제가 설치할 프로그램을 가져갈게요.”


“그래. 준비해둘게. 사무실에 올 때 접수대에 가서 나를 만나러 온 브라운 씨라고 이야기해. 그러면 그게 무슨 뜻인지 알 거야. 네가 방문했다는 어떤 기록도 남가지 않을 거야. 그날 기록된 모든 보안 카메라는 자동으로 삭제되고 네가 떠날 때까지 작동이 중단될 거야.”


“와우. 저랑 똑같은 방식으로 생각하시네요.” 내가 말했다.


바바라가 웃으며 내 어깨를 툭 쳤다. “얘야, 난 이 게임을 끔찍하게 오랫동안 해왔어.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감옥보다는 밖에서 자유롭게 보낸 시간이 더 많았지. 피해망상증이 내 친구야.” (...)


: 제보하려고 언론인을 찾았더니 언론인도 이렇습니다. 


17장


(...) 그때 내 휴대폰이 울려서 둘 다 깜짝 놀랐다. 언제 집에 올 건지 물어보는 엄마 전화였다. 지금 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엄마는 바바라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우리는 전화로 통화할 때는 이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다. 아빠의 제안이었다. 아빠도 나만큼이나 피해망상에 소질이 있었다. (...)


: 마커스의 가족에게 전염되는 피해망상. 


20장


(...) 둘이 잠깐 낮잠을 자라고 권했는데, 부끄럽게도 나는 잠들어 있는 동안 녀석들이 배신할지도 모른다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혔다.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배신을 하려면 내가 눈을 뜨고 있을 때도 쉽게 할 수 있었다. 이 친구들이 나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


: 간만에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됐네요. 안 읽어보고선 아직 무슨 상황인지 잘 모르시겠죠? 여하간 소설은 이렇게 결말을 향해 달려갑니다. 



 

SF 장르 전문 출판사 <아작>의 첫번째 책은 코리 닥터로우의 대표작 <리틀 브라더>이다. 2008년에 나온 <리틀 브라더>는 미국 사회의 관점에서는 ‘근미래 SF’이자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조지 오웰의《1984년》의 ‘빅브라더’를 본딴 책 제목부터가 그 사실을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국토안보부는 특정 소수에 대해 불법적 인신구속과 고문을 자행하고, 불특정 다수에 대해선 광범위한 인터넷 검열과 정보기기를 활용한 사생활 정보 수집 그리고 수집된 정보를 활용한 불심검문 등을 시행한다. 테러 직후 국토안보부에 억류됐다 풀려난 소년은 ‘특정 소수’로서 그들에 대해 분노하고 ‘불특정 다수’의 권익을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일은 꼬여만 가는데... 마커스와 그 친구들의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긴장감 넘치면서도 통쾌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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