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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세오 소설집 <중력의 노래를 들어라> 리뷰: “이윽고 거대한 해일이 될, 첫 파도의 시작점” by 이경희

아작 책방

by arzak 2021. 4. 22.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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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거대한 해일이 될, 첫 파도의 시작

 

남세오는 정말 특별한 작가다.

 

왜냐면 이 사람, 정말 만능이니까. 처음 작가로 모습을 드러냈을 땐 <꿈의 살인자> 같은 미스터리를 쓰기 시작하더니, 은근슬쩍 <사쿠라코 이야기> 같은 호러 괴담을 쓰는가 하면, <열두 개의 낙인> 같은 정통 판타지도 꽤 오래 연재했고, 어느새 <등라모연>이나 <몽선잡문> 같은 동양풍 판타지까지 질투 날 정도로 능숙하게 써낸다. 게다가 이 작품들을 한데 뒤섞은듯한 분위기의 단편인 <탈피>도 있다. 보통은 한 장르도 제대로 다루기 힘들어야 정상인데, 이 작가는 호러, 스릴러, 미스터리, 판타지, (가끔은 로맨스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게다가 이 사람, SF까지 잘 쓴다. 과학자 출신 작가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능숙히 허구를 다룰 줄 안다. 남세오는 SF 영역에서도 다채로운 이야기들을 만들어냈다. <이과가 또, 세상을 구했습니다> 같은 찐 이과 개그 시리즈부터 <스윙 바이 레테> 같은 하드 SF를 거쳐 영미 고전 펄프 스타일을 재현한 듯한 <벨제붑>까지 모두 그의 창작 영역이다. <김미선 시리즈>처럼 아기자기하고 트렌디한 일상 SF를 쓰는가 싶다가, 다시 돌아보면 어느새 <피드스루>처럼 살떨리는 쾌감으로 가득 찬 사이버펑크 액션을 순식간에 써낸다. 심지어 <살을 섞다> 같은 사회파 SF까지 가능하다.

 

이 사람, 정말 뭐든지 써낼 수 있는 모양이다. 반칙도 이런 반칙이 없다. 남들은 겨우 빌딩 한 채 짓고 있는데 혼자 심시티를 하고 있다. 그것도 성실하고 꾸준하게. 첫 작품인 <꿈의 살인자>를 시작으로, 2017년부터 4년간 그는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50편 가까운 작품을 썼다. ‘환상문학웹진 거울의 필진이 된 후로는 매달 한 편씩 거울에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고.

 

더욱이 이 사람, 웬만해선 자극적인 글은 쓰지 않는다. 선정적인 묘사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오로지 정면 승부다. 손쉽게 독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부도덕한 트릭들을 굳이 일부러 피해 가는 것이다. 이유인즉슨, 아이들이 읽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란다. 때문에 남세오의 글을 읽을 때면 언제나 마음이 편해진다. 올바른 글을 마주하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드디어 첫 소설집을 출간하다니, 오랜 팬을 자처하는 독자로서 설렐 수밖에.

 

*

 

남세오의 첫 소설집 중력의 노래를 들어라는 작가 남세오의 다채로운 작품 세계 중에서도 가장 SF 요소가 강한 작품들을 추려 모은 책이다. 맛있는 단어들이 잔뜩 들어간 달콤한 초단편 <로즈 발렌타인의 계절>을 애피타이저로 맛본 후 풍성하게 채워진 총 9편의 수록작을 통해 남세오는 자신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그간 수집해온 다채로운 장르의 재료들을 SF라는 요리 안에 향료처럼 함께 녹여 독특한 테이스트를 뽐낸다.

 

<접근 한계선>은 상대적으로 소프트한 근미래 이야기다. 코로나 시대의 비접촉 로맨스랄까. 온라인을 통해 더 많은 개인 정보가 노출된다면, 서로에 대한 물리적 접촉이 금지된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의 사랑을 욕망하게 될까. 일견 씁쓸하고 건조하고 차가운 이야기일 것 같지만, 아니다. 정말 따뜻하고 촉촉하고 달콤한 이야기다. 정말 귀엽고 또 귀여운 커플이 등장한다.

 

<살을 섞다>는 서로의 살을 베어먹고 먹여주는 끔찍한 세계를 가정한 사회파 SF. ‘살을 섞는다는 중의적 표현을 통해 작가는 권력과 폭력의 습성을 탁월하게 은유한다. 회식 자리를 무대로 하는 탓에 일종의 오피스 스릴러로 생각되기도 한다. 회식이 잦은 직장인이라면 결코 맨정신으로 한 번에 읽어내려가지 못하리라.

 

<중력의 노래를 들어라>는 섬뜩한 이물감에 대한 호러 SF. 우주의 진리에 도달하고자 하는 한 인물의 섬뜩한 집착과 광기. 일견 두려우면서도 매혹적인 광인을 추적하던 기자는 이윽고 커다란 도약의 순간을 맞이한다. 마치 유년기의 끝을 연상케 하는 결말에 이르면 독자는 엄청난 경이감과 해방감을 맞이한다. 그리고 물론 더 큰 우주적 공포도.

 

이어지는 <만우절의 초광속 성간 여행>은 분위기를 확 바꿔서, 너무 귀여운 작품이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 중 가장 발랄하고 대화가 재미있는 단편인데, 한참 웃으며 읽다가 갑자기 두렵고 서늘해지는 호러와 개그를 롤러코스터처럼 오가는 구성이 일품이다. 여러 장르에 능한 작가만이 구사할 수 있는 특별한 테크닉이랄까.

 

남세오는 아이디어와 세계 설정에 능한 작가이기도 하다. 수록작 중 가장 정통파 SF에 가까운 작품인 <카산드라 이펙트>는 예언과 시공간에 대한 색다른 아이디어를 담고 있다. 타임리프 장르의 클리셰를 벗어나기 위한 작가의 고심이 돋보이는 설정이 포함되어 있는데, 스포일러라 이야기할 수 없는 점이 아쉽다.

 

<카산드라 이펙트>가 탁월한 아이디어 소설이라면, <달에 사는 토끼는>은 경이로울 정도로 아름다운 세계 설정을 뽐내는 작품이다. 달빛을 반사하는 거대한 거울과 대지를 비추는 빛의 기둥들. 이동하는 달빛을 따라 그려지는 실버 로드. 머릿속에 시각적인 이미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진다.

 

후반부에 배치되어 있는 세 작품, <마야>, <네 글자로 줄이면>, <에딘에게 보고합니다>는 남세오가 SF 작가로서 관심 있게 탐구하는 주요 주제 중 하나인 인공지능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인공지능과 인간의 관계성을 탐구하는, SF 계에서 지겹도록 꾸준히 반복되어 온 테마를 다루면서도 인공지능 묘사의 클리셰를 최대한 벗어나려는 시도들이 흥미롭다.

 

그중에서도 특히 <마야>는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사랑하는 작품이다. 프레임 드롭으로 시작하는 도입부부터 한없이 로맨틱한 결말까지 너무나 완벽하다. 신체가 없는 인공지능 존재 케이트에게 손에 만져질 듯한 실체감을 부여하는 작가의 테크닉에 몇 번이나 감탄했는지 모른다. 게다가 상상할 수 없이 커다란 스케일로 도약하는 경이로운 결말은 정말이지. 추천하건대, 당신이 이 책을 꼭 순서대로 읽어야 할 이유가 없다면 <마야>를 마지막 순번으로 아껴두시길 강력히 권하는 바이다.

 

*

 

남세오라는 이름을 떠올릴 때면 나는 높다란 빌딩 숲 사이에 UFO처럼 놓인 거대한 그릇을 상상하곤 한다. 남들보다 유독 바닥이 넓고 거대한 그릇을 품고 있는 작가. 그렇기에 서서히 수위를 높여가는 중인 작가. 지금도 작가 남세오의 그릇에는 물이 차오르고 있다. 그릇 가득 물이 찰랑거리는 순간 하늘에서 거대한 손이 내려와 그릇을 뒤집어버릴 것이다. 엎질러진 물은 파도가 되고 해일이 된다. 그렇게 도시는 물바다가 된다.

 

부디 당신도 이 파도를 즐기게 되길. 서퍼들이 가장 즐겁게 파도를 타는 하는 방법은 최대한 큰 파도를 찾아내 그 파도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올라타는 것이라고 한다.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다. 이윽고 거대한 해일이 될, 첫 파도의 시작점.

 

- 이경희, 소설가

 

<중력의 노래를 들어라> 구매하러 가기: 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69338333

 

중력의 노래를 들어라

현직 한국핵융합에너지연구원(KFE) 책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남세오의 첫 소설집으로, 작가 남세오의 다채로운 작품 세계 중에서도 가장 SF 요소가 강한 작품들을 추려 모은 책이다.

www.ala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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