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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어른이 된다는 것: 정이담 장편소설 《순백의 비명》 리뷰 by 전혜진

아작 책방

by arzak 2022. 2. 14.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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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어른이 된다는 것

 

이렇게 숨도 못 쉬고, 숨죽여 읽은 소설은 오랜만이다. 게다가 엄마라는 단어가 이처럼 많이 나오는 작품을 근래 또 읽었는가도 싶다. 리뷰를 위해 파일로 작품을 먼저 받은 터라 검색해보니 이 소설에는 엄마라는 단어가 184번 나온다. 수많은 작품 속에서 때로는 그리움의 대상이고, 때로는 애증의 대상이며, 때로는 극복해야 할 대상인 엄마. 하지만 정이담 작가의 소설 속에서 이 엄마는 자식을 죽이려 했고 끝내 버린 엄마다.

 

2019, 정이담 작가는 가부장의 폭력 속에서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통해 삶을 지탱하고 성장해 나가는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 퀴어 로맨스릴러괴물 장미로 데뷔했다. 그리고 불과 한 해 만에, 사고로 가족을 잃은 두 주인공이 서로의 상실을 치유하는 감각적인 SF 불온한 파랑로 독자를 놀라게 하는가 싶더니, 자신의 진짜 삶을 기록하려는 욕망 속에서 성장한 소녀 선과, 인어증후군을 가진 동갑내기 룸메이트 율의 이야기를 다룬 SF 순백의 비명으로 돌아왔다.

 

순백의 비명SF라고 소개했지만, 여기서 SF는 과학소설(Science Fiction)이라기보다는 사변소설(Speculative Fiction)의 약어에 가깝다. 하지만 작가가 말한 대로 과학소설이면 어떻고 사변소설이면 무슨 상관이며 하다못해 소설이 아니면 또 어떻겠는가. “버림받았다는 공통의 기억 속에서 성장한 두 소녀의 이야기는, 순백색의 심상 속에서 지독하게 맵고 쓴 맛을 낸다.

 

 

금빛 장미, 불온한 파랑, 그리고 순백의 이팝나무

 

이제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선은 갓난아기 때 베이비 박스에 담겨 발견된 이래, 지금까지 줄곧 선우원에서 자랐다. 보호 종료를 1년 앞둔 고등학교 3학년의 봄을 맞이한 선은, 보육교사 이모 두 사람과 로봇 이모 세 대가 분주하게 아이들을 돌보는 선우원에서 자기보다 어린 아이들을 통솔하고, 선천적인 장애 때문에 거동이 불편한 동갑내기 룸메이트 율의 일상을 돌봐야 한다. 그런 선우원에서의 일상이 그려지는 도입부는 마치 키다리 아저씨의 도입부, 우울한 수요일을 연상하게 한다.

 

하지만 선과 율에게는 나이 든 아이를 입양해 가겠다는 양부모도, 웃는 얼굴이 더 예쁘다고 말해주는 동산 위의 왕자님도, 부유한 키다리 아저씨도, 갑자기 대학에 가게 되는 기적도 없다. 그나마 율은 공부를 잘해서 대학 졸업 때까지 기한을 미룰 수 있지만, 선은 지금까지 다른 언니들이 그랬던 것처럼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선우원을 떠나야 한다. 선은 선우원을 떠날 날에 대비해 다섯 번이나 은행에 방문해 겨우 통장을 만들고, 어렵게 독립 자금을 모은다.

 

선은 갓난아기 때 엄마가 옆구리를 칼로 찔러서 자상을 입은 채 발견되었고, 장애를 안고 태어난 율은 이곳에 오기 전 엄마가 물에 빠뜨려 죽이려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옛 가족을 잊고 새로운 사람들과 가족을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자라난 아이들, “무엇을 가족이라 부를지 재설정해야 하는 이 아이들에게 있어, 가족이란 혈연이 아니라 눈물로 이어진 인연이고, “열 명의 이모와 사십 명의 친구들, 로봇 이모, 그리고 이팝나무.

 

선우원에 와서,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지나 더 이상 가족들이 자신을 찾지 않음을 인정할 무렵, 아이들은 화단 구석에 제 이름을 단 식물, 주로 이팝나무 가지를 하나씩 심어 키우며 이곳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괴물 장미를 지배하는 심상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화려한 금빛 장미고, 불온한 파랑을 지배하는 심상이 지구의, 바다의, 혹등고래의 푸른 빛이라면, 순백의 비명을 지배하는 심상은 선우원 마당에 뿌리를 내린 커다란 이팝나무 같은 흰 빛이다. 아이들이 엄마처럼 의지하는 이팝나무의 하얀 꽃, 마치 베이비박스처럼 하얀 양곡 창고와, 쌀알처럼 매끈한 얼굴을 한, 얼굴 없는 여자들의 새하얀 유령들까지.

 

얼굴 없는 여자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고단한 삶 속에서 아이를 버린 엄마들, 계약직으로 들어와 고된 노동을 감당하는 보육사들, 나이가 들어 이곳을 떠난 뒤 힘들고 가난하게 살다가 보증금 사기를 당하고 옥상에서 뛰어내린 언니, 그리고 이곳의 아이들. 그들은 서로를 가족으로 생각했지만, 이곳의 남성들은 그렇지 않았다.

 

과거 어떤 남자직원은 아이들을 성추행하다가 쫓겨나기도 했고, 지금 있는 남자직원은 재단 측과 손을 잡은 채 자신이 노조 위원장을 하겠다고 나선다. 아이들을 학대하고 보호사들에게 횡포를 부렸던 원장은 임기가 남아 있다는 이유로 선우원에 눌러앉아 권력을 휘두른다. 그리고 국가는 권력을 쥔 쪽의 폭력을 방임하고, 여성과 약자 그리고 미성년자의 생존 투쟁을 아주 손쉽게 죄로 규정한다.

 

권력과 손잡은 국가가 미성년자인 선과 율에게도 거침없이 폭력을 휘두르던 날, 양곡 창고에 떨어진 선은 마치 자신의 관념 속 어머니처럼 칼을 든, 얼굴 없는 여자를 본다. 그리고 그날 이후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만 어떤 기계에도 찍히지 않는, 얼굴 없는 여자들이 세상에 나타난다.

 

정이담 작가는 괴물 장미에서 뱀파이어 바네사의 입을 빌려 말했다.

백 명의 여자가 죽으면 한 명의 괴물이 탄생해. 천 명의 여자가 살면 한 명의 삶이 돌아온단다.”

 

그리고 이 책 순백의 비명에서 얼굴 없는 여자들은 기억되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밀려난 여자들의 다른 이름이다. 그들은 이모들이 끌려가고 아이들이 방치된 선우원의 흰 양곡 창고 안, “부서진 로봇 이모와 쌀, , 이모들의 빈자리, 우리의 비명 속에서 태어났다.

 

선우원의 아이들과 이모들, 봉사자, 후원자, 선우원 졸업생, 도배 아저씨와 떡볶이집 아주머니 같은 사람들의 연대가 선우원을 지탱하고, 돈과 권력으로 그들을 찢어놓으려는 세상에 균열을 내듯이, 얼굴 없는 여자들은 연대자들의 표정을 비추고, 산 사람들에게 여자들이 본래 가졌어야 할 얼굴과 역사를 떠올리게 하며 세상에 균열을 낸다. 유령으로도, 반물질로도 불리는 그들은 살아 있는 이들의 거울이다. 마치 선과 율이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듯이.

 

 

기록하고 기억하는 사람

 

그 시간 속에서, 선의 역할은 기록하고 기억하는 사람이다.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복음의 기록자와 같다. 정이담 작가는 기독교적 모티브를 자유자재로 사용한다. 뱀파이어 퀴어 로맨스였던 괴물 장미에서는 보듯이 뱀파이어 바네사에 예수의 심상을 덧입혔다. 불온한 파랑의 푸른빛은 성모 마리아의 푸른빛을 연상하게 한다. 이는 순백의 비명에서 인어증후군을 앓고 있는 율이 유일하게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인 물속과도 연결된다.

 

또한 순백의 비명에서 선이 기록하는 것은 이모들의 이야기다. 선은 이모들의 부재는 존재적 재앙이라고 말한다. “지옥은 신의 부재라는 말이 이 이야기에 적용된다면, 이곳의 이모들은 신, 혹은 신의 대리자다. 그리고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고 키우고 보호하는 신의 사랑을 받는 아이인 선은, 자신의 옆구리에 남은 흉터와 인어의 꼬리처럼 붙어 있는 율의 다리에서, 희생에 대한 두 모티프를 떠올린다.

 

선에게 있어 자신을 찌른 엄마의 날붙이는 제 아이를 제물로 바치려던 아브라함의 칼이요, 인간이 되려면 왕자를 죽여야 한다는 말과 함께 언니들이 인어공주에게 쥐여 준 칼이다. 그리고 선의 앞에 나타난 얼굴 없는 여자는, 마치 이팝나무 꽃 같은 쌀들이 들어 있는 양곡 창고에서 자신의 일부를 깎아 다른 여자들을 만드는 그 거대한 아키타이프는, 선이 상상하던 엄마의 형상처럼 칼을 들고 있다. 아브라함이 거대한 가부장인 신의 명령에 따라 자식에게 칼을 겨눴듯이, 어떤 세상은 제물의 희생으로 굴러간다.

 

 

내가 네 엄마였으면 좋겠다. 아니면 네가 내 엄마 하든가.

 

희생자인 여자의 운명은 다시 어린 딸의 희생으로 이어진다. 질곡 같은 운명의 유전이다. 선의 엄마가 자신의 출산을 없었던 일로 되돌리려는 듯 갓 태어난 아기를 죽이려 했듯이, 율의 엄마가 장애를 안고 태어난 딸을 물에 빠뜨려 죽이려 했듯이. 하지만 제물들의 행성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던 선은, 율을 통해 그 질곡에서 벗어난다. 신과 운명의 명령에 순종하며 누군가를 희생시켜야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인어공주는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 왕자를 찌르지 않는다.

 

환상 속에서 엄마를 만났던 선도 마찬가지다. 선이 절대적인 운명처럼 느껴졌던 칼을 버리고 아이를 안아 들었을 때, 그 고통과 희생의 대물림을 끊기로 했을 때, 엄마는 그가 두려워한 얼굴 없는 여자가 아닌, 선우원의 앞마당에서 아이들을 품어주던 커다란 이팝나무 고목이 된다. 용서하고 극복하며, 선은 실체 없는 존재에 대한 애증으로 괴로워하는 대신, 율과 함께하기로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엄마가 되어주고, 다른 이의 고통을 위해 울고, 용기를 내어 연대하며, 아이를 찌르지 않고도 믿음을 증명하는 길을 찾는다. 기댈 곳 없고, 갈 곳 없는 두 소녀는 끝내 자신을 버린 엄마를 갈망하는 대신, 자신이 상대를 버리지 않는 누군가가 되기를 선택한다.

 

내가 네 엄마였으면 좋겠다.”

징그러운 소리.”

아니면 네가 내 엄마 하든가.”

P. 104

 

태어나자마자 옆구리의 상처로 엄마에게서 처절하게 분리되었던 선은, 이제 성인이 되어 선우원을 다시 나서게 된다. 선이 이팝나무 가지에 손가락을 베이고 울음을 터뜨리는 것은, 그가 정말로 어머니의 집을 나와 탯줄을 끊고 터뜨리는 첫울음이다. 아마도 선은 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엄마도, 이모들도 부재한 삶을, 누군가를 향해 손을 내밀고, 용기를 주고, 그리고 율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삶을.

 

가끔씩, 요즘은 전보다 더 자주,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탯줄을 질질 끌고 다니는 것 같은 사람들을 본다. 그런 이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에서, 선과 율은 이제 엄마를 버리고, 또 엄마에 대한 상실감과 부재마저 지워나가며 진짜 어른이 될 것이다. 그들은 엄마를, 혹은 엄마의 대체를 찾기보다는 서로의 엄마가 되기로 결심하며 유년으로부터 아주 떨어져 나가 온전히 서로를 보게 될 것이다. 결혼을 한다는 건 여섯 명이 한 침대에 눕는 거라는 끔찍한 이야기가 농담처럼 오가는 세상에서, 이보다 온전하게 단 둘만이 함께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을까.

 

전혜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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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백의 비명

정이담 작가의 세 번째 장편소설. 거리 곳곳에 얼굴 없는 여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만 어떤 기계에도 촬영은 되지 않는 기묘한 존재들. 처음에는 괴담 취급을 받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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