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cdc라는 작가가 있었다. 그는 유쾌하게 빈정거리기를 좋아하고, 쉽게 눈길이 가지 않는 것에 애정을 느꼈으며, 성격 나쁜 오타쿠였다. 그의 글은 반짝이는 날붙이 같았다. 칼날에 오래된 미국 애니메이션 캐릭터 스티커가 붙어 있고, 휘둘러봤자 생채기 내는 게 전부인 작은 날붙이. 그의 글을 처음 읽고 나서 앞에 앉아 있는 작가에게 말했다.
“빈정거리기를 잘하시네요.”
“아니, 다정하지 않나요?”
“본인을 빈정대는 확률이 높긴 하지만, 어쨌든 누군가를 빈정대면 다정하다는 말은 듣기 어렵죠.”
스스로의 글을 다정하다 믿었을 dcdc 작가는 이 평을 재밌어했다. 사실 이 작가는 꽤 매력적인 날붙이였다. 《무안만용 가르바니온》에서는 화자를 웃음거리 삼는 대신 화자가 사랑하는 배우 김꽃비를 말했으며, 《대통령 항문에 사보타지》에서는 항문의 대사를 통해 대통령을 날려버렸다.
하지만 그는 어느 순간 날붙이만이 가질 수 있는 스타일리시한 빈정거림을 내려놓았다. dcdc가 사라진 것이다.
생각해보면 dcdc가 사라질 것이란 징후는 꽤 여기저기에서 보였다. 이 징후를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첫 번째 단편집 《대통령 항문에 사보타지》에서 보이던 꽤 노골적인 섹스에 대한 은유가 두 번째 단편집 《구미베어 살인사건》에서부터 사라졌다. 첫 번째 단편집에서 작가는 언뜻 보면 여자와 사귀지 못해 안달이 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위장 전략이었다. 그 당시 작가는 여자와 사귀지 못하는 인기 없는 자신의 이미지를 즐기는 게 틀림없었다. 그딴 걸 누가 즐기나 싶겠지만 사실 연애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마도 이 은유가 사라진 이유는 작가가 실제로 연애를 시작하면서 이 위장이 생각보다 더 참담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둘째, 스타일리시하게 문장으로 후려 패던 대상도 점차 사라졌다. 대통령을 날려버리다가(〈대통령 항문에 사보타지〉) 이후 민폐 중년까지 날리던(《월간주폭초인전》) 그는 알아버린 것이다. 아, 내가 바로 그 민폐 중년이구나(실제로 그는 민폐도 아니고 중년도 코 앞이지만 그래도 알아서 조심하는 편이 백번 낫다. 뭐든지 예방이 중요한 법이다).
셋째, ‘팬심’이 사라졌다. 그는 로봇과 애니메이션과 성우를 비롯한 서브 컬처와 김꽃비(!)를 사랑하며, 그의 작품에는 팬심이 동력이 된 경우도 꽤 많았다(〈일천만 김꽃비가 세종로를 정복했을 때〉, 〈마이클 잭슨 고마워요 사랑해요〉, 〈구자형 바이러스〉, 《무안만용 가르바니온》). 그는 자기 자신보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더 빛났다. 그런데 이 팬심조차 글에서 사라지다니. 실제로 그의 방에는 아직도 정체 모를 건담박스가 반다이몰에서 정기배송된 것처럼 차곡차곡 쌓이는데 왜 글에서는 더 이상 찾을 수 없는가. 도대체 dcdc는 왜 사라졌는가? 이 세 가지 징후를 종합하자면 하나다. 이 작가는 나이를 먹고 말았다.
젊은 날의 반짝반짝하던 작가가 점차 누군가를 후려 팰 수도 없고(그 누군가가 나니까), 빈정거릴 수도 없고(나를 빈정대는 것도 한두 번이지), 무언가를 열망할 수도 없다 보니(나이 먹고 나니 더 이상 이거 파는 사람이 없어) 그는 작가로서 가장 큰 매력이었던 날붙이를 더 이상 쓸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대신 그는 이전보다 조심스러워졌고 사랑할 다른 대상을 찾았다. 그렇다면 이제 나이를 먹은 dcdc는 무엇이 될까.
이 질문의 답이 바로 이 단편집 《공상연애소설》이다. 이 책은 dcdc가 홍지운이 되어가는 과도기를 그대로 담았다. dcdc의 흔적은 이 책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우주에서 돌아온 지옥견 라이카의 복수〉에서는 저 대신 죽으라고 개를 우주로 날려버린 인간에 대한 문제의식을, 〈귀자모신나강전〉의 이민자이자 혁명가인 슈퍼 히어로인 귀자에게서는 들여다보지 못한 영웅에 대한 애정과 감사를, 〈눈물이 많은 거인〉에서는 다정함조차 윤리적으로 들여다보는 작가의 결벽증을. 이는 이전의 dcdc에게도 있었지만 화려한 스타일에 가려져 있던 윤리적이며 다정한 작가의 문제의식이다.
첫 번째 단편집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지만 두 번째 단편집 《구미베어 살인사건》에서 그는 이미 동화와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썼고, 곰인형을 통해 버려진 존재들을 들여다보았다. 어쩌면 이 작가는 그때부터 이미 빈정거리지 않고, 공격하지 않고, 찬양하지 않고 무언가에 대해 말하는 방법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dcdc는 사라졌지만 날붙이 대신 뭉툭한 손잡이를 남겼다. 한때는 칼의 일부였으나, 이제는 누가 손에 쥐어도 안전한 손잡이를. 이제 dcdc가 아닌 홍지운은 이 손잡이에 무엇이든 꽂을 수 있다.
자, 이제 dcdc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하고 홍지운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 작품집에서는 홍지운이라는 작가가 나아갈 수 있는 두 갈래 길을 보여준다.
〈당신이 잠든 사이에〉는 그야말로 정말 잘 쓴 연애 소설이다. 첫 번째 단편집이 섹스에 대한 은유가 넘쳤다면 이번에는 ‘연애’다. 아주 지극히 당연한 전개다. 이제야 뭘 좀 아는 것이다. 섹스가 사건이 아닌 일상이 되는 삶에서 어떤 감정이 자리 잡게 되는지. 그래서 사실 이 작품은 소설이기도 하지만 작가를 아는 사람에게는 연애 비법서 정도로 읽힐 수도 있겠다. 어떻게 하면 키가 165센티미터도 안 되고 작고 마른 몸집에, 겨울이 되면 이를 닥닥 떨어가며 컵라면을 양손에 쥐고 궁상스럽게 걸어가는 남자가 연애를 할 수 있었는가. 그건 윤리적인 다정함과 명확한 주제파악 덕분이다. 연애를 글로 배울 거라면 이 단편을 읽으라고 하고 싶을 정도인데 그 이유는 명확하다. 내가 이 작품을 읽고 그와 결혼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무안만용 가르바니온》을 읽었을 때는 좋은 동료로 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헌책방의 왕〉은 이 책에서 가장 dcdc적이면서 가장 dcdc적이지 않은, 홍지운으로 뻗어 나가는 분기점의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이전의 dcdc라면 절대로 나오지 않을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매력적인 적대자 손지상이다. 그동안 작가는 빈정거리기 위해 적대자를 등장시켰지만, 이 작품에서 손지상은 화자의 존경과 사랑이 가득 담긴 인물이다. dcdc였다면 이런 인물은 적대자가 아닌 주인공이었을 것이며, 그는 특유의 말재간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헌 책에 대해 찬양하고, 책에 파묻히는 자기 자신을 빈정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홍지운의 주인공은 사랑하는 대상에 파묻히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벗어난다. 사랑했던 세계와의 작별이다. 그럼에도 그 누구도 빈정대지 않는다. 이미 홍지운은 아는 것이다. 파묻히는 것도, 떠나는 것도 모두 사랑의 방법이라는 것을. 이러한 태도는 작가의 ‘팬심’과도 연결되는데 이전까지의 dcdc가 ‘팬심’으로 글을 쓰고 무언가를 찬양했다면 이제 홍지운은 찬양하기를 멈추고 자신이 사랑했던 것을 더 오래 들여다본다.
홍지운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이제 유쾌하게 대화를 나누고, 여전히 쉽게 눈길이 가지 않는 것에 애정을 느끼며, 기혼 오타쿠다. 그의 글은 이제 고양이털 묻은 뭉툭한 손잡이에 날붙이가 아닌 꽃 몇 송이가 자리한다. 이 단편집을 펼친 독자에게 이제는 내가 묻고 싶다.
“아니, 다정하지 않나요?”
여전히 좀 웃기긴 하지만.
— 문아름, 청강문화산업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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