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반은 여성이고, 반은 인간이다” 팁트리의 페미니즘SF
체체파리의 비법
어떤 책들은 너무 늦게 도착한 나머지 가장 적절한 때에 당도한 셈이 된다.
서기 2016년 대한민국에서 이 소설들은 놀랍도록 당대성으로 생동한다.
40년 묵은 이 낡은 책을 처음으로 경험하는 감각에 축복이 있을지니.
‘페미니즘 SF’의 기수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는 그의 세계적 명성과 걸맞지 않게 국내에서는 단편 대표작들을 묶은 이 책 ‘체체파리의 비법’으로 처음 본격 소개되는 작가다. 작가의 삶과 이력 자체가 드라마틱하다. 본명은 앨리스 브래들리 셸던으로 여성이며, 변호사 아버지와 작가 어머니 사이에서 금수저로 태어났다. 사교계의 유명인사였고, 아프리카에서 최초로 야생 고릴라를 직접 본 백인 여성으로 기록됐을 정도로 전 세계를 주유하는 귀족적 삶을 살았다. 1942년 군에 입대해 공군 조종사와 군 정보원으로 일했으며, 제대 후 실험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여성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남성적 문체로 ‘페미니즘 SF를 쓰는 헤밍웨이’로 불렸지만, 1977년 이 은둔의 유명작가가 여성임이 드러나며 문학계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눈먼 남편을 간병해오다 1987년 총으로 쏘아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
메타포의 공간으로 탁월하게 기능하는 SF의 세계에서 팁트리는 세계를 조망하는 광대한 상상력과 미래를 향한 탁월한 전망을 보여준 작가다. 표제작 ‘체체파리의 비법’에선 짝짓기 행동의 실패로 ‘페미사이드’(여성학살)를 자행하는 ‘아담의 아들들’을 그리고, ‘접속된 소녀’에서는 대중의 저항으로 광고가 불법이 된 미래, 추한 외모의 하층계급 여성을 기계인간의 뇌 회로와 연결해 황홀한 소비의 여신으로 살게 한다.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에서는 우주비행에 나섰다 통신이 두절된 비행사들이 300년 후, X염색체 훼손의 결과로 여자들만이 인구 200만의 규모로 살아가는 훗날의 지구와 맞닥뜨리게 한다. 핵을 떼어낸 난자에 체세포 핵을 삽입하고 자궁 속에 다시 착상시키는 방식으로 자매들을 출산하며 장수하는 여성이 곧 인류인 세계. 과거로부터 귀환한 남성 비행사들에게 이 온화한 여전사들은 “당신들이 맡았던 진화적 역할에 고마워해요”라고 말할 뿐이다.
여성이 썼음이 너무도 뻔한 이 소설들을 SF의 헤밍웨이라고 치켜세웠던 것이 의아하기 이를 데 없지만, SF 소설가 듀나의 해설처럼 “남자들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들이 디폴트 성이고 감추어진 게 없”기 때문이다. 작가 자신은 커밍아웃 후 “나는 가는 곳마다 최초의 여자라는 이유로 주목 받은 경험이 너무 많았다. 남자라면 덜 눈에 띄리라 생각했다”고 밝혔다. SF의 또 다른 거장 어슐러 르 귄은 “팁트리의 작업은 그 자체로 남성과 여성이 서로에게, 그리고 서로를 위해 발언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을 증명한다. 그 방법을 배울 마음이 있을 때는 말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도발적인 상상력을 개연성 있게 만드는 때로는 남성적이고 때로는 여성적인, 그래서 인간적인 문장들과 더없이 슬픈 몇몇 장면들이 두고두고 잊히지 않을 듯하다. “여보, (당신에게) 나는 안전하지 않아” 외치는 ‘체체파리’의 남편과 그의 비극, 인조인간의 아름다운 육체에 뇌를 대여했을 뿐인 추녀의 슬픈 사랑 같은 것들 말이다. “나는 반은 여성이고, 다른 반은 인간이에요. 오늘날 그 두 가지는 같지 않지요.” 작가가 1984년 편지에 쓴 문장이다. 3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두 가지는 같지가 않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