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니 윌리스 지음, 김세경·정준호·최세진 옮김/아작 펴냄(2016)
남의 말과 행동을 보고 형태와 의미를 해독하는 일은 언어학자나 행동심리학자만이 하는 일은 아니다. 모두가 평생 타인을 이해하고 그들이 우리를 이해하게 하려 애쓴다. 세계의 경계는 언어의 구분으로 그려진다.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른 행성에서 온 것이고, 그들이 쓰는 말은 외계어와 다름없다. 세계의 구분이 존재하는 이상, 불통 또한 언제나 내재해 있다.
코니 윌리스의 단편집 <여왕마저도>에 수록된 ‘모두가 땅에 앉아 있었는데’에서는 이 “불통하는 외계”라는 표현이 은유가 아닌 현실로서 재현된다. 이 이야기의 서술자인 멕은 언어 전문가로서, 덴버에 착륙한 외계인들과 소통하기 위한 세 번째 위원회에 참가한다. 알타이르인이라고 불리는 이 외계인들은 언어학자, 인류학자, 우주학자, 목사 등 온갖 전문가들이 갖은 방법으로 소통을 시도해도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멕은 이 알타이르인들이 짓는 “못마땅한 표정”을 보면서 말없이 태도로만 불쾌함을 발산하던 주디스 고모를 떠올린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위원회는 알타이르인들의 소통을 이끌어내는 실험의 일환으로 쇼핑몰로 데려간다. 사람들이 가득한 쇼핑몰 한복판에서 이제까지 어떤 일에도 무반응이었던 알타이르인들은 어떤 이유론가 바닥에 느닷없이 주저앉는다. 멕은 성가대 지휘자인 캘빈과 함께 그들이 반응을 보인 대상이 캐럴 합창곡 ‘기쁘다 구주 오셨네’의 한 구절, “모두가 땅에 앉아 있었는데”임을 알고 알타이르인들이 반응을 보일 노래를 찾아 헤맨다.
과학소설에서 크리스마스 계절에 어울리는 로맨스 코미디까지로 뻗어 나가는 이 소설에서 멕과 캘빈은 수없이 많은 캐럴의 여러 버전을 들어보며 고군분투하지만 알타이르인들의 반응 조건은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다 멕은 언니에게서 주디스 고모가 그렇게 까다로운 사람만은 아니라는 말을 듣고 깨닫는다. 주디스 고모는 자신이 문명적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에게만 자신의 방식대로 친절해진다. 알타이르인들도 마찬가지, 그들이 문명의 상징이라고 인정하는 행동을 지구의 인류에게서 볼 수 있었을 때야 비로소 언어의 문을 연다.
소통이란 결국 문명의 영역에서만 가능하다. 문명이라는 역어의 원래 표현이었던 영어 ‘civilized’에는 시민으로서 갖춰야 할 교양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소통의 가장 아름다운 점은 다른 세계에서 온 남을 드디어 이해할 수 있다는 결과가 아니라, 통하지 않는 어려움에도 이해하려고 애쓰는 태도일 것이다. 이 노력이 문명화된 교양의 다른 정의일 수도 있겠다 싶다.
영리하게 웃기고 섬세하게 불안하며 고요하게 서글픈 단편집 <여왕마저도>에는 이외에도 여성성을 정의하는 정치적 태도들을 꼬집은 표제작 ‘여왕마저도’, 지하철에 부는 절망의 응집체에 대한 경험 ‘마블아치에 부는 바람’, 화성인의 침략을 막은 에밀리 디킨슨의 시 분석 연구서 ‘영혼은 자신의 사회를 선택한다’와 이제는 사라진 최후의 것들에 대한 회고담으로서 ‘마지막 위네바고’가 수록되었다. 나는 모두가 그리워하는 추억을 그린 마지막 단편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알타이르인들이 어떤 노래에서 문명을 발견하고 입을 열었듯이 나에게는 한때 깊이 사랑했지만 잃었던 개에 대한 이 이야기가 소통의 가능성으로서 문명의 징후인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