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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는 왜 그렇게 열심히 학문을 익혔을까요? : 조선스팀펑크연작선《명월비선가》 작가의 말 by 박애진

아작 책방

by arzak 2022. 1. 13.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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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비선가》는 원래 아작에서 출간된 앤솔러지 《기기인 도로》 수록작으로 구상했던 글이었기에 작가의 말에서 《기기인 도로》도 잠시 언급하고자 합니다.

 

《기기인 도로》는 ‘조선시대에 증기기술이 발달했다면?’이라는 가정하에 쓰인 조선 스팀펑크 앤솔러지입니다. 정명섭, 김이환, 박하루, 이서영 작가와 함께 참여했습니다. 앤솔러지에 넣을 글로 《명월비선가》를 구상했는데 쓰다 보니 도무지 단편으로 풀어갈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해서 출판사에 양해를 구하고 <군자의 길>이라는 단편을 새로 써서 보냈습니다. 《명월비선가》와 <군자의 길>은 설정은 공유하되 독립된 이야기라 어느 이야기를 먼저 읽든 상관없습니다.

 

《기기인 도로》 기획 단계에서 각기 다른 스타일을 가진 작가들의 이야기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공통 인물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출판사의 제안이 있었습니다. 해당 인물의 설정을 누가 짤 것인가를 두고 사다리 타기를 했는데요. 박하루 작가가 당첨되었습니다. ‘도로’는 그렇게 박하루 작가의 설정으로 세상에 나오게 됩니다. 각기 개성이 다른 작가들이 설정을 맞추기 쉽지 않다 보니 《기기인 도로》의 도로는 작품마다 조금씩 성격을 달리 합니다. 

 

중단편도 그러할진대 장편은 더 말할 나위가 없는지라, 제가 쓰는 조선시대 스팀펑크 연작은 제 연작 내에서는 나름의 통일성을 유지하려 하나 다른 작가들의 설정과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몇몇 작가들이 《기기인 도로》 후속작을 준비하고 있는데요. 그 글들 또한 같은 뿌리에서 나온 다른 가지로, 평행 우주처럼 같은 세계이자 다른 세계의 이야기로 뻗어 나가게 될 것입니다. 

 

《기기인 도로》 앤솔러지 기획에 참여하기로 한 뒤 어떤 인물을 중심으로 할지 고민했습니다. 당시 제가 바란 인물상은 누구나 이름을 들으면 바로 알 유명한 사람일 것, 하위 계층일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바로 황진이가 떠올랐습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어려서부터 자연스레 전래동화 형식으로 혹은 역사 속 야사로 황진이에 대한 이야기를 접했을 텐데요. 황진이는 아리따운 외모와 더불어 시화에도 능하고, 학문도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를 바라보는 시각은 대체로 기생이기에 많은 사내들의 여인이 될 수 있었으나 또한 한 사람만의 여인이 되지도 않았던 신비로운 존재, 성적 판타지를 불러일으키는 인물이었습니다.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황진이는 왜 그렇게 열심히 학문을 익혔을까요? 천민이자 여인이었던 그가 학문을 익힌다 한들 관직에 오를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요. 그리고 황진이는 어느 날 홀연히 관노청을 떠나 길에서 떠돌다 죽었다고 합니다. 생몰 연대가 불분명하고 야사로만 전해지는 이라, 그가 왜 명성을 떨친 기생이 누릴 수 있는 화려한 생활을 버리고 떠났는지, 어디에서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착안해 나온 인물이 바로 소설 속 인물 ‘진이’입니다. 

 

글 안에서 황진이의 기명인 ‘명월’은 사용하나 황진이라는 전체 이름은 의도적으로 쓰지 않았습니다. 여러 번 영화나 드라마로 재탄생한 인물인지라, 자칫 기존의 이미지에 갇힐까 우려되어서였습니다. 같은 이유로 야사 속에서 명월과 얽힌 인물들도 일부러 잘 알려지지 않은 자(字)나 호(號)를 사용했습니다. 명월에 대한 자료를 찾으며 이 많은 야사 속 사내들을 어떻게 배치할지 고민했는데요. 뜻밖에 각기 있을 곳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글을 쓰는 작가조차 예상치 못하게 진행되는 이야기와 인물들의 면면이 글을 쓰는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더불어 이 이야기를 통해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가장 하위 계층인 천민에 속한 기생의 시선으로 당시 조선 시대를 그려보고자 했습니다. 한 시대를 바라보는 관점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수만큼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래전에 본 찰리 채플린을 소재로 한 한 컷 만화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합니다. 극장 화면에서 찰리 채플린이 구두끈을 포크로 둘둘 말아 스파게티처럼 먹는 장면이 나오자 일등석 자리에 앉은 부유한 관객들은 박장대소하고, 이등석에 앉은 보통 관객들은 적당히 웃고, 삼등석에 앉은 가난한 이들은 눈물을 글썽입니다. 아마도 그들에게는 개그가 아닌 현실이었기 때문이었겠지요.

 

IT 강국인 대한민국에서 출퇴근길에도 각종 스트리밍 서비스로 드라마를 보고, 게임을 즐기고, 음악을 듣고, 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외된 곳에서 끼니를 때우기도 버겁게 살아가는 이들 또한 존재합니다. 우뚝 솟은 아파트 단지에는 정돈된 화단에서 화사한 꽃이 피지만, 그 아파트 단지에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같은 동네인데도 금이 간 양철 지붕을 얹은 집 앞에 스티로폼 상자를 놓고 상추와 대파 등을 키워서 찬거리에 보태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양쪽에 사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대한민국은 아마도 많이 다른 곳일 테지요. 어릴 때 읽은 위인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참으로 한결같았습니다. 착하고, 공부 잘하고, 부모님 말씀 잘 듣고, 형제간에 우애가 깊고, 자라서는 여색을 탐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극 로맨스에서 단골손님으로 등장하는 장면이 남자 주인공이 아리따운 기생을 앞에 두고 무심한 모습을 보이는 겁니다.

 

흥미로운 건 여색을 탐하지 않는 이를 칭송하면서도 조선은 일부다처제를 끝까지 유지했다는 점입니다. 당시 노비는 개인 소유인 사노비와 국가 소유인 공노비로 나뉘었는데, 기생은 국가에 소속된 노비, 즉 관기였습니다. 유흥 때 흥을 돋우기 위한 노비 제도를 국가 차원에서 갖추어 운영했던 겁니다. 놀랍게도 관기와 간음하거나 첩으로 들이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다만 아무도 지키지 않았을 뿐이었죠. 심지어 서로 한 기생을 차지하겠다고 무관들이 자기 휘하의 병사들을 동원해가며 벌건 대낮에 몽둥이 싸움을 벌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면서 어우동에게는 간음죄를 물어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국가 소유의 노비인 기생의 시선으로 본 조선은 잔혹하고 모순으로 가득 찬 세계였습니다.

 

 

이 책을 쓰면서 《그림으로 읽는 조선 여성의 역사》(강명관, 휴머니스트), 《열녀의 탄생》(강명관, 돌베개), 《중종의 시대: 조선은 어떻게 유교국가가 되었는가》(계승범, 역사비평사), 《한국의 유교화 과정》(마르티나 도이힐러, 너머북스) 외 여러 책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물론 《명월비선가》라는 작품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제게 있습니다. 서곡은 마더 구스의 <누가 울새를 죽였나?>를 변주해 썼습니다. 마더 구스는 영국 등지에서 17세기부터 유행한 일종의 잔혹 동화 혹은 동요로 작자는 미상입니다.

 

《명월비선가》와 <군자의 길>은 제가 스팀펑크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 계기가 되어주었습니다. 스팀펑크는 ‘전기 동력 대신 증기기관이 계속 발전했다면’이라는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는 SF의 하위 장르입니다. 소설로는 《견인 도시 연대기》(필립 리브), 《해저 2만리》(쥘 베른), 《라미아가 보고 있다》(팀 파워스) 등이, 애니메이션으로는 <천공의 성 라퓨타>,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이, 영화로는 <휴고>, 《견인 도시 연대기》를 영화화한 <모털 엔진>처럼 다양한 작품이 있습니다. 스팀펑크의 매력은 쉬운 걸 일부러 어렵게 하는 골드버그 장치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통로를 따라 굴러간 구슬이 망치를 건드리고 망치가 움직여 시소를 누르고, 시소 끝에 달렸던 성냥이 그어지며 실에 불을 붙이고 실이 타면서 실에 묶였던 햄이 프라이팬 위에 떨어져서 구워지는, 그냥 햄을 들고 가서 굽는 게 훨씬 쉬울 것 같은데 일부러 어렵게 만들며 즐기는 것처럼, 전기 동력이 발전한 현대의 기술로 구현하면 쉬울 걸 증기 기관으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고안합니다. 현대는 내부 부품을 가리지만 스팀펑크는 내부의 나사, 톱니바퀴 등등을 드러내는데, 거기에서 그로테스크한 미학이 창조됩니다. 무궁무진한 상상력의 나래를 펼 수 있는 세계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려야 할 분들이 있습니다. 박하루 작가께 장편에도 도로의 설정을 써도 좋을지 물으니 흔쾌히 허락하셨습니다. 멋진 인물상을 만들어 이 연작의 큰 축을 잡아주고, 앤솔러지 수록작이 아닌 다른 글에도 사용을 허락해준 박하루 작가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퇴고를 꽤 많이 하는 편인데, 아작의 교정은 그런 제게도 버거워서 처음에는 다소 당황했습니다만, 마지막까지 놓지 않고 꼼꼼히 봐주신 덕에 저 역시 반복해서 글을 훑으며 부족한 점을 가다듬을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 글을 함께 작업해주신, 설재인 편집자, 오유진 디자이너, 최지혜 편집자께 감사드립니다. 여러 편집자와 디자이너께서 애쓰셨는데도 부족한 점이 있다면 그건 전적으로 작가인 제 책임입니다.

 

《기기인 도로》, 《명월비선가》에 이어 도로가 등장하는 또 다른 조선 스팀펑크 작품으로 독자 여러분을 만날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제가 이 연작을 쓰며 스팀펑크의 매력에 흠뻑 빠졌듯이, 스팀펑크를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조선과 스팀펑크의 접목이 신선함을 주고, 스팀펑크를 처음 접하는 분들은 또 다른 즐거움을 맛보는 계기가 된다면 기쁘겠습니다.

 

2022년 1월

박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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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비선가

증기기술이 도입된 조선에서 펼쳐지는 조선스팀펑크연작선 첫 장편소설. 기생 명월은 증기기술로 움직이는 기녀의 공연이 가능한 명월관을 지어 그 이름을 천하에 떨치지만 도로는 명월의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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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기인 도로

조선시대에 이미 증기기관이 도입되고 발전했다면 우리 역사는 과연 어떻게 변했을까? 증기기술이 도입된 조선에서 펼쳐지는 기기인 도로의 모험. 이제 K-스팀펑크의 시대가 온다. 장르소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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