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이라는 말은 우습다. 신인이라고 소개되는 순간 정말로 신인이 되어 버린다. ‘패기’나 ‘풋풋’ 같은 단어가 한줄평에 등장할 테고 가끔은 ‘미숙’과 같은 어휘도 보일 수 있을 터이다. ‘미숙’이란 단어를 선택한 독자는 그가 언제부터 글을 썼는지, 얼마나 오래 재료를 다듬고 숙성시켰는지 알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음식점을 오픈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맛을 보고는 ‘신생 가게라 그런가요, 좀 더 내공을 쌓을 필요가…’와 같은 리뷰를 쓰는 손님은 주인장이 칼질을 시작한지 반년 된 초보인지 아니면 몇십 년 동안 남의 주방에서 손목이 나가도록 웍질을 하다 왔는지 알 도리가 없다. 경력을 광고하지 않는 한 말이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문학계에서 지금껏, 광고할 수 있는 경력은 지면이 존재해야만 가능했다. 지면이 와야 경력으로 인정되고 그 경력이 한참 쌓여야 신인이라고 분류라도 될 수 있는 초현실적 생태계(그러니 분명 오랫동안 글을 써온 SF작가들이 신인으로 호명되는 웃지 못할 상황들 역시 자꾸만 벌어지는 것이다). 아마 현재의 국내 SF계에서 흔히 보이는 다작의 경향성도 그래서가 아닐까. 지면이 올 때 미친 듯 살아남아야 한다는 걸 모두들 경험을 통해 아는 것이다.
윤이안 작가는 스튜디오에 들어서자마자 “너무 떨려서 어떡하죠?”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신인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은 한예종 서사창작과에 재학 중이던 201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SF 소설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가 당선되어 등단한 이다. 이른바 ‘메이저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6년. 작가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데뷔 이후로 청탁을 거의 못 받았어요. 투고 메일을 20군데 넘게 돌렸는데 다 안 됐고요. 등단 이후 4년 만에 냈던 첫 소설집 《별과 빛이 같이》는 일반인 책 출간 프로젝트인 ‘경기 히든작가’에 신청해 선정되어서 나온 거예요. 사실상 그 책 판매고는… 슬펐고요. 내 소설이 재미가 없나 보다 생각했어요.
작가는 자꾸 자신에게로 화살의 방향을 돌렸는데 《별과 빛이 같이》를 읽은 에디터로서는 활을 빼앗아 무릎에 대고 분질러버리고 싶은 입장이었다. 미안하지만 저는 그 소설집 재미있었다고요, 작가님(에디터의 원픽은 〈기린에게〉다). “그게 아니라, 누군 밀어주고 누군 안 밀어줘서 그런 거 아니에요?”라 묻자 작가는 고개를 저었다.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등단했다고 생각해요. 지금 그 작품을 보면 제 기준으로도 너무 미숙한 점들이 빤히 드러나요. 장르소설 문법을 전혀 모르고 마구잡이로 쓴 소설인데 덜컥 당선이 되어서…. 당시에 리뷰를 찾아봤는데 “이건 SF가 아니다”라고 비판하는 글이 있었어요. 문법을 모르고 무작정 쓴 거니까 그런 소리를 들어도 항변할 수가 없었죠. 그런데 그때의 저에게는 그게 최선이었거든요. 지금은 그걸 인정하려고 노력해요. 저때 나는 저만큼 쓰는 게 최선이었구나, 하고요.
또 죄송하지만 등단작 되게 좋은데요, 작가님. 게다가 그때 작가님은 이미 소설을 숱하게 쓰고 지옥의 합평(그는 ‘합평이 무섭다’는 말을 등단 당시의 인터뷰에서 참 많이 했다)을 통과하고 있던 분이었잖아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걸까.
지면이란 게 쉽게 오지 않는다는 걸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어서요, 지금은 포기한 상태예요, 나한테 지면이 오지 않는 상태는 아주 평이한, ‘보통의 상태’다. 게다가 저는 사실 독자의 존재를 실감한 적도 없어요. 혼자 쓰던 기간이 너무나 길었기 때문에요. 독자란 말 자체가 너무 낯설어요.
이쯤 되니 화를 내기도 지쳤다(당연히 작가에게 화를 내서는 안 됐다. 작가에게는 잘못한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는 그저 에디터의 성질머리가 더러운 탓이다). 그리하여 일단은 궁금한 것을 먼저 묻기로 하였다. 아직 SF가 기존 문단에서 쉽사리 ‘문학’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던 2016년, 안드로이드 ‘이안’이 등장하는 SF로 등단한 이후 지면이 없던 시기를 거쳐온 작가는 무엇을 하였을까.
아까 말씀드렸듯 SF가 아니라며 힐난하는 리뷰를 봤거든요. 그래서 “그러면 SF문법이란 게 뭔데?”라는 의문이 생기는 거예요. 궁금하니 공부를 해야죠. 그러니까 저는, ‘SF가 아니’라던 평 때문에 SF에 입문을 하게 된 거예요.
원래 어렸을 때부터 책으로 도피하는 아이였어요. 미스터리, 로맨스, 판타지… 장르도 가리지 않고 다 봤는데 이상하게도 SF를 그때까지 제대로 읽은 적이 없었죠. 오기에 가득 차서 읽을 책을 찾기 시작했는데 딱 아작 출판사 초창기와 맞물리던 시기였어요. 레이 브래드버리나 코니 윌리스처럼 당시에 번역되어 나오던 외국 걸작으로 입문을 했죠.
그리고 작가는 2019년, 아작에서 진행한 신인작가 양성 프로젝트 ‘폴라리스 워크숍’에 신청서를 넣었다. 등단을 했지만 SF계에서는 인정되지 않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등단 이력 때문에 신청은 반려되었다. 그러나 작품을 본 아작 측에서 먼저 출간을 제안했다. 그렇게, ‘공부’를 하러 왔던 작가는 그대로 출간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아마 입문하고 배우려 했던 시도 자체가 이미 작가의 작품 세계에 변동을 일으켰기 때문일 것이다.
한예종에서 공부하던 시절에는 개인의 감정에 집중해서 글을 썼거든요. 제가 혼자 써서 혼자 보는 글이었기 때문에 저에게 위로가 되는 소설을 쓰는 게 좋았어요. 상실과 치유 쪽에 집중을 했고요. 그런데 SF 소설을 연구하고, 또 졸업 이후 시나리오 작법을 공부하면서, ‘움직이는 인물’을 만들어내는 게 재미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요. 사건이 생기니까요. 한동안 그 두 가지 스타일을 병행하며 작업을 했는데, 최근 들어서는 인물을 끝없이 행동하게 만드는 쪽이 아무래도 제게 더 맞지 않나, 하는 확신을 가지게 됐어요.
그 확신 덕일까. 작가는 올해 두 권의 소설을 내게 됐다. 기후 미스터리 《온난한 날들》(안전가옥), 그리고 SF와 판타지가 버무려진 단편집 《세 번째 장례》(아작, 근간)다.
《온난한 날들》이 그런 변화가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일 거예요. 《세 번째 장례》가 중간쯤에 있고요. 한 해에 두 권의 책이 나오다니 정말로 예외적인 해예요! 정말 기쁘죠.
작업 스타일은 조금 달랐어요. 아무래도 단편과 장편의 차이랄까요. 원래 저는 ‘이런 이야기를 쓰면 좋겠다!’ 정도만 잡아놓고 시작하는 스타일이었어요. 기껏해야 로그라인 정도. 그래서 사실 인물들이 어디로 갈지,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저도 모르는 상황이에요. 그런데 장편을 쓰면서는 조금 더 세밀한 지도를 만들어야 했죠. 안전가옥과 작업할 때는 트리트먼트를 모두 짜놓고 집필했어요. 처음 해본 시도였죠. 중간에 한 번 완전히 갈아엎은 때가 있었지만 그래도 원고가 막히진 않으니 그 방식도 좋더라고요.
요새 기본적인 흥미 요소는 언제나 인물의 움직임이에요. 장르 공부를 하기 전까지는 인물의 성격, 파생되는 관계 정도에 초점을 맞췄다면 지금은 이 애들이 행동하는 걸 보며 뿌듯해하는 거예요.
그러나 전과 후를 관통하는 줄기가 하나 있었으니 ‘사람’이었다. 작가는 사람을 그린다.
사람이 사람 아닌 것을 사랑하는 상황이 재미있어요. 이를테면 AI 스피커를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에 대한 소설(〈어릿광대를 보내주오〉) 같은 게 그런 생각에 집중하면서 나온 거예요. AI보다는 사람들이 그로 인해 어떻게 변화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쪽에 더 관심이 있어요. 사람은 어째서 기어코 안드로이드를, 기계를 사랑하게 되는 걸까요? 동시에 왜 어떤 사람은 기계에게, 타자에게 그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요? 그런 생각을 해보는 게 재미있어서요.
그런데 에디터님이 질문지에, 제 소설에서는 인물의 배리에이션이 큰데 그에 비해 안드로이드 등의 무생물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고 쓰셨잖아요. 저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읽고 걱정됐어요. 저 아직도 SF에서 멀리 있는 건가… 불안해서요.
맙소사. 그런 질문을 던진 이유는 그의 SF가 가지고 있는 독특함 때문이었다. 바보 같고 구멍이 나 있고 그만큼의 다정함을 지닌 무생물을 통해 서로 다른 수많은 인간이 구원 받는 과정이 흥미로워서. 아무래도 질문을 잘못 전한 것 같다는 자책을 하며, 어느 쪽으로 화제를 돌려야 할지 머리를 굴렸더니 키워드가 하나 나왔다.
세계관이요? 맞아요.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다른 인물이 있으면 재미있지 않을까 해서 서서히 쌓아가고 있어요. 이름이 특이한 고양이(‘밤에 뜨는 달’)를 만들고, 그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이 겪는 좀비 사태를 상상하고, 그 좀비 사태가 터졌을 때 다른 사람은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또 상상하고… 그런 식으로 넓혀가는 거죠. 사실은 제가 재미있어서 해보는 거예요. 그런 방식을 택하면 거기서 또 제가 배우는 게 있고요.
배운다는 말을 참 많이 한다. 읽는다는 말도. 그러니 하고 싶은 게 많지 않을까 했다. 역시나 그랬다.
웹소설도 재미있게 보고 있어요. 여러 장르의 소설을 아주 쉽게 접할 수 있는 형태인 것 같아서 공부 중이에요. 작업 시간도 더 늘릴 거고요. 일단 저 자신에게 주는 선물로 좋은 의자 먼저 사려고요. 허리 안 아프게요.
좋은 의자에 앉아서 마침내 어떤 작가가 되고 싶을까.
‘마침내’요? 모르겠어요, 그런 먼 목표는 하나도 없어요, 아직. 정말 코앞만 보고 더듬더듬 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도 듣고 싶은 말은 있어요. 페이지터너. 그 말을 듣고 싶어요. 소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낮잡아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니에요, 얼마나 이루기 힘든 건데요. 게다가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는 소설은요, 쓰는 사람도 신이 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 정도가 제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먼 목표예요.
‘그래도 영애야, 너랑 있으면 내가 아무리 우스워져도 즐거워.’
《세 번째 장례》의 교정지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문장에 연필로 여러 번 밑줄을 치다 생각했다. 걸쭉하게 욕을 뱉는 AI 스피커가 등장하는 마지막 수록작은 어느 동네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사람들의 이야기였으며 저 문장 역시도 참 단순한 문장이었다. 그러나 어떠한 종류의 시간을 통과한 누군가의 표현은 지극히 단순해질 수밖에 없으며, 단순한 문장으로 손에 든 연필의 심을 닳게 만드는 것은 그 시간의 누적에서 오는 무형의 힘이라고. 오늘도 작가는 의자에 앉아서 읽고, 공부하고, 돌아보고, 인물들을 불러다 한 뼘씩 움직이며 사람과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물을 것이다. 받아 적을 것이다. 그 시간 동안 덜 걱정하고 더 기뻐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안전한 의자를 찾아냈으면 좋겠다. 믿고 몸을 맡길 만한 의자,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견고한 의자. 그리고 무엇보다 어느 오후 슬며시, 작가의 모호한 물음에 평상시의 성마른 삐걱거림 대신 “내 생각은 말이야” , 라고 뻔뻔하게 대답할 수 있는 의자를 샀으면 한다. 그러고는 눈을 크게 뜨고 빤히 쳐다보는 것이다. 어이, 인간. 왜 놀라? 당신의 하루하루가 나를 만들었어, 그러니 이제 나를 사랑해주는 것이 어때? 라는 마음을 담아서.
어션 테일즈 No.4 Interviewed by Seol Jaein, Photo by Melva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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