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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들 속에서' : 출판사 서평

아작 리뷰/05 타인들 속에서

by arzak 2016. 3. 4.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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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우리에게 판타지는 무엇일까


책을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은, 십대 시절의 한 순간만큼은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대상이란 착각을 하며 산다. 삶은 전체적으로 볼 때는 풍성하고 아름답지만, 어떤 시기엔 종종 버텨내야 할 것으로 전락한다. 그리고 책은 ‘지금 이 순간의 나’를 견디기 힘든 이들에게 삶을 지탱할 유효한 도구 중 하나다. 이 소설은 바로 그런 힘으로 십대를 견뎌내온 이들을 대변한다. 그런 탈출구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버텨본 경험이 있다면 그 대상이 무협인지 판타지인지 SF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으리라. 그렇기에 이 책은 영미권의 특수한 세대를 위한 책을 넘어서, 모든 시절의 모든 세대를 위한 책이 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여기 판타지 소설을 읽는지 그 소설을 사는지 애매모호한 소녀가 있다. 《반지의 제왕》과 《나니아 연대기》의 내용에 매우 익숙한 것처럼 보이는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마녀라고 말한다. 마녀를 쉽사리 믿지 못하는 우리는 다만 그녀의 어머니가 미쳤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녀는 자신과 그 쌍둥이 자매가 어머니에게 맞섰다가 자매 중 한쪽이 죽음의 희생을 치러야 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살아남은 쪽이 바로 자신이라고 말한다. 그 말을 믿기 힘든 우리는 다만 너희 가족들에겐 이해하기 힘든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소녀가 마법을 믿을 때 생겨나는 일들


그렇지만 그녀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한 방식은 마법이다. 그녀는 자신의 마법을 통해서야 비로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믿지 않는 이들에겐 별 거 아닐 수 있는 그런 주장이다. 사실 소녀의 말을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본질적인 차이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이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쩌면 우리는 대답을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마법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우리 대부분은 이런 종류의 애매한 설명이 아니면 지나치기 힘들 그런 시절을 지나쳐왔다. 우리 모두는 한때 스스로가 특수한 존재라 여겼다. 오늘날에도 아이들은, 자신들을 해리포터네 마법학교에서 불러가야 할 특수한 존재라고 믿는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다가와 “너는 사실 머글이 아니야. 나를 따라오렴...”이라고 말하기를 기다린다. 그들의 절대다수가 그 기다림에서 이득을 보지 못하겠지만, 그렇게 해서 삶을 버틸 수 있다면 그래선 안 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누구나 자신을 특수한 존재라 여기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아서 좌절하는 시대다. 이런 상황에서 <타인들 속에서>의 주인공인 모리는 어쩌면 자신의 특수함을 쉽게 인정받을 수 있는 조건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가령 모리는 영국의 한 지역인 웨일스의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만으로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모리는 어머니가 마녀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요정을 보고 마법을 부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자신의 특수성이 설명된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무리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도 아니라 사물을 바라보는 특수한 방식 때문에 특수하다고 생각한다. 






자존감과 자기객관화 사이에서 


그렇다. 이런 균형감각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결국엔 자신이 특별하다고 믿지만 어째서 특별한지에 대해선 설명을 달리하는 그런 균형감각 말이다. 사실 우리 중 상당수는 이만큼도 특별하지 않은 이유로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자존감과 자기객관화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않으면 역시 비슷한 과업에 흔들리는 타인들이 가득 찬 세상에서 길을 잃게 된다. 모리는 아직 본격적으로 세상에 합류하지 못했지만, 그러기 전에 무엇을 해야 할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외로움에 지친 주인공은 자신과 생각을 나눌 만한 사람인 ‘카라스’를 얻기 위해 무려 마법까지 쓴다. 주인공과 독자들은 이 카라스의 마법이 효과가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다만 그녀가 이 마법을 사용한 이후에 자신이 즐겨 읽었던 SF 소설에 대한 독서토론의 기회를 손에 얻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인공이 겪는, 떨쳐 내려는 외로움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사실 이 외로움은 우리에게 익숙했던 것이 아닌가? 그리고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익숙하지 않음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모리의 간절함에 비한다면 어쩌면 ‘카라스’를 얻기가 너무 쉬운 시대다. 그리 규모가 크지 않은 언어권을 살아가는 한국 사람들도 좋아하는 취향의 동료를 웹상에서 얻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즉, 이전 시대에 비한다면 우리는 누구나 카라스의 마법을 쓰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우리가 과연 많은 사람들이 원했던 ‘카라스가 있는 삶’의 충만함을 얻고 있는지는 또 별개 문제다. 우리는 우리의 ‘카라스’ 속에서 이상하게도 다시 고독을 느낀다. 그리고 이 고독 속에서 또한 매번 새로운 카라스를 꿈꾼다.






우리에게 다가온 오래된 교신


그럴 때엔 새로운 질문을 해보는 것도 좋겠다. 우리에게 판타지란 무엇일까.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고, 그걸 원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 우리는 내가 바라는 판타지를 얻기 위해 무엇을 노력하고 있고, 그 노력을 공유하는 이들은 누구일까. 나는 그들에게 어떻게 교신할 수 있을까. 모리는 이 점을 간절하게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에 SF적인 풍경 속에서 판타지를 살았고, 삶이 마법 같았으며 마법이 삶이 되는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사실은 판타지 소설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지만 정말로 판타지 소설 같다”라는 어떤 평은 그런 의미에서 적절하다. 우리 삶에 존재하는 환상과 마법은 어쩌면 현실보다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것은 교신에 대한 이야기이다. 가령 이 소설에서 저 유명한 판타지 소설가 어슐러 K. 르 귄의 한 세계관의 통신수단인 ‘앤서블’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 이것은 교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신기하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그 소녀가 1979년에 접했던 SF와 판타지 소설의 대부분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그 걸작들이다. 그것이 여전히 우리에게 걸작인 이유는 ‘앤서블’의 신호는 어떤 지역에는 수십 년이 지나서야 와닿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날 그들이 느꼈던 풍요를 누리며, 그 신호에 대답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여전히 그녀에게서 ‘타인들’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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