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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슐러 르 귄의 가디언지 리뷰

아작 리뷰/05 타인들 속에서

by arzak 2016. 3. 29.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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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들 속에서>에서 15세 모리가 사랑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등장하는 어슐러 K 르 귄은 2013년 가디언지에 <타인들 속에서> 서평을 쓴 바 있습니다. 해당 리뷰를 번역해보았습니다. 


http://www.theguardian.com/books/2013/mar/30/among-others-jo-walton-review


소설 속 요정들은 어리석고, 야만적이며, 예측할 수 없다. 십대 화자 모리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월튼의 요정에 관한 토속적 민담은 멋들어지게 현실화된다. 

이 아름다운 제목의 소설엔 요정 혹은 요정이라 불릴 수 있는 존재들이 등장하므로 동화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소설에서 요정들은 모두에게 보이지는 않지만, 아직도 그들을 보지 못하거나 믿지 못하는 이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요정들은 산업화된 현대 영국에서 과거의 민담에나 나올 법한 역할을 맡아 행동한다. 

하지만 그들은 요정의 모습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들은 그렇게까지 키가 크지 않고, 당신을 비밀스럽고 관능적인 곳으로 데려갈 만큼 분별있는 이들도 아니다. 그들은 <한 여름밤의 꿈>에 나오는 조그마한 요정이나 빅토리아 사람들이 사랑했던 유령도 아니고, 팅커벨과는 가장 거리가 멀다. 

소설의 주인공이면서 화자인 모리는 언제나 요정을 볼 수 있었고 그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보는 요정들이 톨킨 소설의 엘프 같기를 바란다. 하지만 요정들은 품위 있거나 강력하지 않고, 속박되어 있고 주변적이며 어쨌든 조그맣다. 요정들 중 일부는 인간이 죽어서 된 유령인 듯 하다. 그들은 길들여지지 않았고, 문명화되지 않았으며, 예측될 수 없다. 그들은 대부분의 경우 웨일즈어로 말한다. 그들은 인간이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대답하지 않지만, 적절하게 질문한 경우엔 당신의 소원을 들어줄 수도 있다. 요정들은 야생의 조각이며, 오직 숲 속의 흔적에서만 살아가는 이들이 살아남는 방식이며, 초인간적인 어떤 것의 흔적으로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타인들 속에서>는 초자연적인 힘이 등장하는 이야기에서 흔히 보이는 황야의 마술 같은 진부한 공식을 만들지 않는다. 요정에게 소원을 들어주도록 하려면 어떻게 요청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식은 일종의 마법이지만, 그 이면은 상당히 위험하다. 통상적인 근대적 삶(이 경우엔 1979년의 오스웨스트리)에 초자연적 사건을 가져오는 것은 소설가에게 쉬운 작업이 아니다. 리얼리스트들은 ‘판타지’란 개념이 아이들에 관한, 혹은 아이들을 위한 것으로 소개될 때에만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도록 버려두고 떠났다. 하지만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을 포개는 건 본질적으로 유치한 게 아니다. 심지어 "어른들을 위한" 많은 소설들이 리얼리즘의 전성기에도 이런 방식으로 쓰여졌다.

그런 것들 중 내 마음에 다가왔던 첫번째 작품은 그 미묘하고도 매력적인 <여우가 된 부인>이다. 다른 많은 작품들에서 그렇듯 데이비드 가넷의 이야기에서 초자연적인 요소들은 설명되지도 않고 논쟁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거기에 그렇게 있다. 그것은 훌륭하고 심미적인 책략인데, 왜냐하면 만약 이 문제가 논란이 된다면 작가는 타당성과 인과관계 두 문제 모두에 대해서 정면으로 씨름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즈음 대부분의 판타지들은 마법에 현대소설적 설정과 도덕성, 감정적 무게에 대한 책임을 실어주면서 불가능한 것을 그럴듯하게 포장한다는 함정을 피해간다. 반면에 조 월튼은 용기와 기술을 가지고 두 가지 도전을 받아들이고 대면한다. 그녀는 마법 주문의 영향력을 보여주고 설명하는 쉬운 방법을 보여주며, 그러면서도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모든 행동에 대해 어떻게 대가가 지불되는지를 보여준다. 마법의 세계에도 존재하는 이러한 절대적인 상호작용은 뉴튼의 제3법칙(작용/반작용의 법칙)의 세상을 보여준다. 

이 소설의 내러티브는 15세 모리의 일기지만 그 내용적 측면에서 성인으로서의 모리가 함축적으로 존재하며, 그것이 책을 대단히 풍요롭게 한다. 모리는 스타일 있게 글을 쓰고 강박적으로 읽는데 대부분이 SF소설이다. 다만 기회가 주어지면 그녀는 하인라인이나 젤라즈니에 대해 그렇게 하듯 플라톤까지 걸신들린듯 읽는다. 그녀의 비판적인 메모는 청소년 특유의 힘찬 확신을 가지고 배달되는데 큰 기쁨이다. 개인적으로는 T.S. 엘리엇이 ‘멋지다’는 것을 배워서 기뻤다.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너무 많은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모리는 그녀의 독서를 ‘보상'으로 바라본다. 사실 책은 그녀에게 열정과 함께 예술과 사상에 대한 더 심도높은 사실성에 접근할 수 있는 맹렬한 지성을 주었다. 책은 그녀가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로부터 그녀가 분리되는 것, 박살난 골반의 아픔, 여성 기숙학교의 숨이 막히는 옹졸함, 점잖으면서도 이상한 세 명의 고모님들, 마법으로 공격하는 미친 마녀 엄마를 견뎌내게 해줬다. 심지어는 읽기가 그녀를 결국 실패하게 할지라도, 그것을 통해 모종의 동료애를 발견했고, 어떤 사람들은 그녀의 인생에 따뜻하게 포함될 것이며, 그녀는 마법에 의지할 수 있다.  

<타인들 속에서>는 여러모로 웃기고, 사려깊으며, 예민하고 몰입하게 만드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마법의 부분에선 그것들 이상이다. 모리가 자신이 카라스의 마법을 쓰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녀의 새로운 친구들이 그녀에게 우정을 주는 선택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깨달았을 때, 그녀가 겪게 되는 도덕적 고통은 권력의 책임에 정직하게 직면한 모든 이들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신속하게도 쉽게도 해결되지 않았다.

소설의 백미는 모리가 요정들의 명령에 복종하여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가야 할 곳으로 가도록 돕는 웨일즈 골짜기에서의 한 장면이다. 모리를 불구로 만든 추돌사고에서 그녀의 쌍둥이 자매는 죽음을 맞았는데, 이 때에 자매의 영혼은 어둠의 문 앞에서 모리에게 매달리고 움켜잡으며 그녀를 가도록 놔두지 않는다. 이 부분에서, 그 과묵함과 드라마 속에서 지워질 수 없는, 모든 상실에 대한 비탄과 거의 견딜 수 없는 상황에서 대두하는 추스름의 필요가 있고, 오래된 발라드와 조용하고 불가해한 경험에 기대는 사실적인 나레이션은 신비로운 현실을 창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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