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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들 속에서' : 역자 후기

아작 책방/05 타인들 속에서

by arzak 2016. 3. 4.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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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후기: 타인들 속에서 타인들 속으로


열다섯 살은 미묘한 나이이다. 아이도 어른도 아니고, 책에도 사람에도 사건에도, 모든 것에 민감하게 영향받고 상처받고 위로받으며, 어떻게 살까 이전에 처음으로 어렴풋하게나마 삶의 무게를 느끼기 시작한다. 나를 이해해줄 사람은 없는 듯하고, 늘 타인들 속에서 산다는 기분이 나를 외롭게 한다. 그래서 열다섯 살로 산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그리고 이 책의 주인공인 모리는 바로 그러한 열다섯 살의 소녀이다.


책과 상상놀이를 좋아하는 모리는 정신이 이상한 어머니 때문에 쌍둥이 자매가 죽고 자신은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된 뒤 어머니를 피해 도망쳐 쉼터에 몸을 의탁한다. 그리고 곧 평생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에게 가게 된다. 모리를 어찌할 바 몰랐던 아버지와 고모들은 모리를 기숙학교로 보내고, 그곳에서 평범한 아이들과 어울려보려던 모리는 결국 실패해 좌절하다가 인근 읍내 도서관의 독서모임에서 다시 세상에 발을 디딘다. 그리고 분신과도 같던 쌍둥이 자매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이고도 혼란스런 사건을 마침내 온전히 받아들이고 자아를 찾음으로써, 쌍둥이 자매를 따라 자살하려는 유혹들을 이겨내고 쌍둥이의 반쪽에서 오롯이 자신만으로 다시 일어선다.


반년 정도의 일기로 구성된 이 소설은 전체적 줄거리만 본다면, 한 소녀가 성인의 세계로 입문하는 과정에서 내면적 갈등을 겪으며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세계에 대해 각성한다는 면에서 전형적인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소설에는 다른 성장소설에 없는 독특한 부분들이 있다.





우선, 이 책에서는 SF가 모든 것의 매개체가 된다. 우리나라보다 비교적 SF와 판타지 소설의 위상이 높은 영미권에서도 이런 장르문학은 여전히 주류문학에 끼지 못하고 있으며 이런 책을 주로 읽는 독자들은 걱정스러운 눈길을 받게 된다. 그러나 모리는 지금보다도 그 위상이 더 낮았던 70년대에 SF와 판타지 소설을 읽고 그걸 정신의 자양분 삼으며 자랐고, 그래서 그런 소설을 읽지 않고 이상하게 보는 주위 사람들에게서 고립감을 느낀다. 하지만 이제 SF는 완전히 낯선 사람이나 마찬가지이던 아버지와 열렬히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주제가 되고, 기숙학교의 탈출구이던 도서관에서 만난 SF 독서모임은 모리가 다시 세상으로 연결되고 나아가는 계기가 된다. 즉, 사람보다 책을 더 소중히 여기며 ‘타인들 속에서’ 살던 모리는 SF를 통해 책 밖의 세상, ‘타인들 속으로’ 손을 뻗게 된다. 그리고 1980년에 글래스고에서 열릴 이스터콘은 이제 모리에게 세상과 만나는 희망찬 약속이 된다.


또한, 수많은 SF들이 언급되고 있긴 하지만 이 소설의 전체적 얼개는 판타지 소설이다. 모리는 쌍둥이 자매와 함께 사악한 마녀인 어머니에 맞서 세계를 구해내고 주위엔 요정과 마법이 가득하다. 그러나 이 책은 클라이맥스가 아닌, 극적인 사건들이 모두 끝난 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쌍둥이는 죽고 자신은 불구가 된 뒤 승리 이후의 상처를 수습하고 그 후의 삶을 살아가려 애쓴다는 면에서, 오히려 대하 판타지 소설의 에필로그에 가깝다. (이 책이 굳이 클라이맥스가 아닌 그 이후를 다루는 이유는 작가가 자신은 늘 ‘그 후의 이야기’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진짜로 존재할 수 있고 상상일 수도 있지만) 곳곳에 등장하는 요정들과 마법은 이질적이지 않다. 작가는 요정과 마법이 정말로 실재한다고 설득력 있게 들리길 바랐기 때문에, 거듭되는 우연의 결과라고 간단히 부정할 수 있는 마법 시스템을 창조해냈고, 자연과 융화되는 ‘유치하지 않은’ 요정을 지향했다.


그러나 소설 속 요정은 단순히 판타지 소설의 분위기를 주려는 요소로서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흑백으로 세상을 보는 어린이들이 그렇지 않은 어른보다 요정을 더 잘 본다는 모리의 말처럼, 요정은 모리가 아직 어른으로 완전히 성장하지 않았다는 상징이기도 하다. 그리고 요정들과의 여러 일화는, 분신 같은 쌍둥이가 죽은 뒤 사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정체성을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찾아오는 자살의 유혹과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치열한 노력 간의 갈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이런 특징들 외에도 이 책에는 많은 SF 소설들이 등장하고, 주인공이 짤막하게나마 그 책에 대한 평을 한다. 따라서 SF와 판타지 문학의 독자, 특히 본서에 등장하는 책들을 읽은 독자들이라면 이 책에 굉장한 흥미를 느낄 것이다. 하지만 많은 독자들이 이 책에 동질감을 느끼는 이유는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누구나 거쳐 가는 열다섯 살이라는 보편성 위에 SF와 판타지 소설이라는 특수성이 더해져 있다. 그래서 SF와 판타지 소설을 읽고 가슴 뛰는 경험을 하며 자란 독자들에게 이 책은 설렘으로 가득한 연서라고 할 수 있다. 독자들은 주인공 모리가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 SF와 판타지 소설을 무시하던 사람들 속에서 느낀 고립감을 다시 한 번 완벽하게 동감할 수 있을 것이며, 모리가 온갖 SF와 판타지 소설을 놓고 하는 생각들, 그리고 SF 독서모임을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고 세상과 소통하는 길을 찾는 모습에서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똑같이 깊은 흥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굉장히 개인적이면서 SF와 판타지 문학이라는 특수한 장르를 주제로 삼았는데도 이 책이 수많은 독자에게 “바로 내 얘기”라는 찬사와 함께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는 점에 우리가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지막으로, 모리에게 책은 힘겨운 현실에서의 도피처였을까, 아니면 흑백논리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이 세상과 현실의 문제에 대해 이해를 도와주는 도구였을까. 후자의 경우, 일견 이 세상과는 상관없는 외계나 마법에 대한 책들이 눈앞의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로 과연 적합할 수 있는 걸까. 그 대답으로 SF 독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말을 덧붙이고 싶다. “내가 SF에 대해 항상 좋아해 온 점 중 하나는, SF를 보면 여러 일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들을 여러 각도에서 보게 된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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