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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작 책방/05 타인들 속에서

‘타인들 속에서’에 나오는 ‘팁트리 쇼크’

3월 8일은 세계여성의 날입니다. 이런 날 무려 ‘페미니즘 SF의 기수’라 불린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막바지 책 작업을 하고 있는 아작출판사의 마음도 묘합니다. 팁트리는 여성 작가이면서도 데뷔 이후 10여년을 남자 행세를 하였고 그 정체가 발각되었을 때 SF팬덤에도 ‘팁트리 쇼크’라고까지 칭해진 충격이 왔다고 하죠.  


마침 지난 2월 20일에 출간된 아작출판사의 다섯 번째 소설인 조 월튼의 《타인들 속에서》에도 팁트리와 팁트리 쇼크에 관한 얘기가 등장합니다. SF를 좋아하는 십오세 소녀의 시점에서 팁트리와 팁트리 쇼크는 무슨 의미였을까요? 소설에서 구절을 찾아봅니다. 


1979년 10월 2일 화요일


사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따뜻한 세계들 그리고 그 외 단편들》은 《바람의 열두 방향》 제2권과 막상막하이다. 나라면 그래도 르 귄이 여전히 앞선다고 하겠지만, 생각했던 만큼 확연한 차이는 아니다. 오늘 아버지에게 받은 소포에 들어있던 다른 두 권은 둘 다 젤라즈니다. 아직 펼쳐보지도 못했다. 《빛과 어둠의 피조물들》이 워낙에 별났다.(p61-62) 



1979년 10월 13일 토요일


(...) 난 새로운 팁트리 선집을 샀다. 이 책에는 르 귄의 소개 글이 있다. 르 귄도 이 남자를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서로 좋아하다니 정말 멋지다. 어쩜 톨킨과 루이스처럼 둘이 친구일지도 모른다. 톨킨 전기를 쓴 험프리 카펜터가 모든 인클링스(옮긴이: 1930년대 초반에서 1949년 말까지 거의 20년 동안 지속된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비공식적 문학토론모임으로, 톨킨은 이 모임에 무척 열심히 참석했다.)에 대한 새 전기를 썼는데, 그 책이 서점에 들어왔다. 양장본이다. 도서관에 신청해야겠다.(p80-81)



대체로 르 귄과 함께 언급됩니다. 팁트리가 1915년생, 르 귄이 1929년생입니다. 나이차가 적지는 않지만 1970년대에 이들은 이미 함께 활동하던 작가였죠. 하지만 팁트리는 1987년에 사망하였고 르 귄은 아직까지 살아있기에, 르 귄은 팁트리 사후 1991년에 제정된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상’(젠더문제에 대해 문학적 시야를 넓힌 SF와 판타지를 대상으로 하는 상)을 몇 번이나 수상하는 작가가 됩니다. 《타인들 속에서》의 조 월튼도 2014년 팁트리상 수상작가죠. 르 귄은 여성작가이며, 팁트리는 남자 행세를 했지만 결국 여성작가였는데, 묶여서 비교되고 있었다는 것이 의미심장합니다. 




1979년 10월 21일 일요일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가 여자였다! 맙소사!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맙소사, 로버트 실버버그는 창피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어 해야 마땅하다.(옮긴이: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가 여자임이 밝혀지기 전, 《다잉 인사이드》의 작가인 로버트 실버버그는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따뜻한 세계들 그리고 그 외 단편들》에 서문을 쓰면서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가 절대로 여자일 리 없다고 썼다.) 하지만 난 로버트 실버버그가 개의치 않을 거라 장담한다. (내가 《다잉 인사이드》를 썼다면, 그 뒤론 아무리 바보짓을 하더라도 더 이상 개의치 않게 될 것 같다. 《다잉 인사이드》는 세상에서 가장 울적한 책 같다. 내 말은, 우울하기론 하디와 아이스킬로스에 절대 뒤지지 않지만, 또한 너무나 훌륭한 책이다.) 그리고 팁트리의 단편들도 훌륭하다. 비록 <접속된 소녀>에 비길 작품은 없지만 말이다. 난 팁트리가 남자인 척한 게 존중받기 위해서였던 거 같다. 하지만 르 귄은 남자인 척하지 않고도 존중받았다. 팁트리는 휴고상을 탔다. 내 생각에 어떤 면에서 팁트리는 쉬운 길을 택한 거 같다. 하지만 팁트리의 등장인물들이 잘못 알려주기와 위장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생각해보라. 어쩌면 팁트리도 그런 걸 좋아하는지 모른다. 내 생각에 모든 작가는 등장인물을 가면으로 이용하고, 팁트리는 자신의 남자 이름을 또 다른 가면으로 쓴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내가 <사랑은 운명, 운명은 죽음>을 쓰고 있다면, 나라도 내가 어디 사는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을지 모른다.(p93)



팁트리의 정체가 탄로난 것은 1977년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는 아니니, 인쇄물을 통해 소식을 접하는 SF팬 개개인이 그 사실을 알게 되는 시기엔 시차가 있었을 겁니다. 《타인들 속에서》의 주인공 모리는 무슨 경로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를 적지는 않았습니다. 일기는 보고서나 반성문이 아니니까요. 


팁트리는 군과 CIA에서 일한 적이 있었고, 그 당시에 여자라는 이유로 주목받은 것이 너무 지긋지긋했기에 남자처럼 보이는 필명을 만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남자 행세를 한 여성 작가’로서 더 주목받게 되었죠. 그리고 1980년대에도 ‘제임스 티트리 주니어’란 이름으로 작품활동을 계속하게 됩니다. 모리의 해석이 어느 정도 적절한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겨야겠네요. 참고로 모리가 언급하는 두 편의 단편 중 <접속된 소녀>는 이번 달에 아작에서 출간하는 《체체파리의 비법》의 수록작 중 하나입니다. 



1980년 1월 30일 수요일


팁트리가 주제였다! 팁트리가 여자란 걸 미리 알았어서 기쁘다. 안 그랬다면, 다들 “그녀가”라고 말을 시작할 때에야 팁트리가 여자인 걸 알고 끔찍한 충격에 빠졌을 테니 말이다. 난 팁트리 책을 모두 읽진 못했고, 단편집 두 권을 봤을 뿐이다. 그리고 이 상황을 어서 바로잡아놔야겠다는 걸 알겠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모임에서 얘기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너무나 훌륭한 이야기인 <접속된 소녀>와 <사랑은 운명, 운명은 죽음>에 대해 한참을 얘기했는데 둘 다 내가 굉장히 잘 아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해리엇이 모임을 이끌었고, 잘하긴 했지만, 난 해리엇이 르 귄 때도 모임을 이끌었던 걸 기억하므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생각하게 됐다. 내 말은, 왜 해리엇이 이끈 두 번이 다 여자 작가였고, 남자가 모임을 이끌 때는 여자 작가를 다룬 적이 없느냐는 거다.


키스는 정말로 팁트리를 좋아하지 않고, 자기 생각엔 팁트리가 반(反) 남성주의 같다고 했다. 팁트리를 남자인 줄 알았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키스는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가 공포스럽다고 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남자들이 그 중편을 읽고 공포를 느끼는 것은 이해한다.(p346-347) 


모리는 르 귄과 팁트리에 대해 토론한 SF독서모임의 모습에서도 젠더문제를 느끼고 자신의 생각을 적게 됩니다. 여성작가들을 매개로 일상의 젠더문제까지 성찰하게 되는 모습이 흥미롭습니다. 3월 8일은 이러한 성찰이 필요한 날이 아닐까 합니다. 참고로,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도 《체체파리의 비법》의 수록작입니다. 제목은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로 번역됐습니다. 《타인들 속에서》를 읽고 팁트리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는 독자분들의 반응도 몇 개 본 적이 있는데요. 한달 간격으로 출간되게 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