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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체파리의 비법' : 출판사 서평

아작 리뷰/06 체체파리의 비법

by arzak 2016. 3. 30.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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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혐오와 페미니즘의 시대에 팁트리를 읽다 



  2016년의 대한민국에서 젠더문제는 매우 첨예한 이슈다. 특히 온라인상에서의 남녀갈등 구도는 극심하다. 이는 지난 십여 년 동안 온라인에서 공기처럼 여겨지던 여성혐오 담론에 대한 일군의 젊은 여성들의 적극적인 대처에서부터 나타났다. 페미니즘이란 단어는 불과 몇 년 전에 비해서 훨씬 더 큰 설득력의 울림을 지닌 단어가 되었으며 스스로가 페미니스트라고 커밍아웃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과학기술과 젠더문제의 관계는?


  젠더문제가 첨예해지는 이유에 대해서는 크게 보아 두 개의 가설을 세울 수 있다. 하나의 가설은 여전히 남성중심 사회가 공고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남성중심 사회가 점점 더 해체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 대부분 여성들은 전자에 대한 주목을 요구하고, 남성들은 후자라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불과 백여 년 만에 삶의 양상을 완전히 뒤바꾸는 식의 사회변화를 겪은 한국 사회에선 기준점을 어디에 잡느냐에 따라 의견이 천지차이다.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살던 세상과 비교하면 변화가 너무 빠르고, 지구촌 다른 여성들의 세상과 비교하면 변화가 너무 느리다. 


  젠더문제는 흔히 정체성의 문제로 치부되기 때문에 문화적인 측면에서 많이 고찰되지만, 조금만 생각해봐도 과학기술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남녀관계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과학기술은 사회구조를 바꿀 수 있고 그 변화는 결국 남녀관계도 바꾼다. 우리가 미래에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남녀관계가 올 수 있다 기대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SF의 페미니즘적 가능성과 페미니즘 SF


  그런 점에서 볼 때 사변소설의 일종으로서의 SF소설은 젠더문제를 의미있게 지적할 수 있는 유효한 도구다. 성차는 ‘몸’과 ‘습속’에서 모두 나타나는데, 우리의 ‘몸’은 일정 부분 결정된 채로 태어나며 그렇게 태어난 ‘몸’이 ‘습속’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니 말이다. 젠더문제를 얘기할 때 우리는 자신이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사변적 가정을 통할 때에만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몸’이 상당 부분을 결정해버리는 성차의 문제에서 몸의 구성 자체를 바꾸어 본다는 가정은 이미 그 자체가 상당히 SF적이다.    


  그러나 SF에 그토록 많은 가능성이 있음에도 그 가능성이 언제나 온전하게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장르에도 성차에 대한 편견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SF는 상당히 남성적인 장르로 여겨진다. 과학기술이나 이공계와 같은 전공 자체가 남성에게 어울리거나 익숙한 것이란 편견이 있다. 그렇기에 SF에도 페미니즘의 문제가 대두될 수 있다. 장르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고 장르 자체가 지닌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말이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는 그런 점에서 볼 때 ‘SF의 페미니즘적 가능성’을 온전히 실현한 작가였다. 이는 그가 활동했던 1970년대가 미국 사회에서 급진적 페미니즘의 시기였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작품은 당대의 분위기를 반영하면서, 특유의 상상력으로 당대의 문제의식을 앞서 나갔다고 생각된다. 한국 사회가 최근 해외의 페미니즘 운동의 조류에 관심을 보이고 동참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지금 여기’에서 팁트리의 가치를 발견하는 일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적당한 시간에 도착한 팁트리?


  한국 사회에 SF소설이 유입된 이후 상당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와 같은 고전적 명성을 가진 작가가 이제야 본격적으로 소개되는 이유에 대해 서술하려 든다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사실 ‘남자인 척 했던 여성 작가’였다는 팁트리의 고유한 맥락은 그를 소개할 때 작가 개인의 일대기를 지나치게 상세하게 들여다보도록 만든다. 


  그러나 그의 소설은 그가 백인 중년남성을 연기할 때에도 선풍적인 주목을 받았고 그는 ‘훌륭한 남성 페미니즘 SF작가’로 여겨졌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SF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인간의 문제를 심오하게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팁트리의 소설은 수십 년 전에 쓰여졌지만 충분히 급진적이며 우리로 하여금 여러 가지 생각을 하도록 만든다. 그것은 우리의 나태하고 빈약한 상상력에 경종을 울리면서 다가올 시대의 여러 문제와 갈등들을 예고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팁트리가 너무 늦게 왔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이야말로 팁트리를 읽어야 할 때다’라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경직된 혐오의 시대에 팁트리는 우리의 생각을 자유롭게 만들 여러 가지 사유실험을 제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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