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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브라더' : 출판사 서평

아작 리뷰/01 리틀 브라더

by arzak 2015. 10. 15.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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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출판사 서평


리틀 브라더


‘리틀 브라더’, 우리 시대의 고전이 될 자격이 충분한 책

“안녕하세요, 한국 독자 여러분. 서구에 사는 저 같은 사람들에게 한국은 100메가 광케이블과 PC방, 프로게이머가 넘치는 약속의 땅입니다. 한국은 인터넷으로 연결된 미래를 서구보다 앞서 나갔지만, 그와 동시에 디스토피아적인 감시 역시 선두에 서 있습니다. (...) 이 책은 정보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한 책입니다. 이 책은 컴퓨터가 우리를 어떻게 감시할 수 있는지 경고하는 책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컴퓨터가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수 있을지에 대해 묻는 책입니다.”

소설 《리틀 브라더》의 저자 코리 닥터로우가 보내온 한국어판 서문은 소설의 그것치곤 지나치게 진지하다. 소설 내용을 덮어두고 생각한다면 선진국의 정보인권 활동가가 한국 사회의 시민들에게 보내는 연대의 메시지와 다를 바가 없다. 이러한 저자의 자못 진중한 자세는 소설의 다층적인 특성과 관련이 있다.

책 속에 소개된 영어권의 소설 평가를 봐도 그 다층성은 드러난다. <뉴욕타임즈>는 이 책을 “흥미진진한 스릴러”라 단언하면서도 “인터넷 시대의 시민권에 대해 논쟁적인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 디지털 개인정보 보호를 위한 실용 매뉴얼”이라 평했다. <가디언>은 “정부의 보안 분야가 커져가는 시대에 개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모든 시민들이 컴퓨터를 이해해야 한다고 열정적으로 호소한다”라고 지적하면서도 “게다가 기가 막히게 재밌는 책이다”라고 덧붙인다. 이 소설이 2008년에 출판된 이후 여러 소설가와 논픽션 작가들, 그리고 정보인권 활동가와 해커들이 비슷한 평가를 공유했다. 《리틀 브라더》는 어떻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었을까?

매우 평범한, ‘세상을 구하는 소년’의 이야기, 그런데?

“내 이름은 마커스 얄로우, 나는 샌프란시스코의 볕 좋은 미션지구에 위치한 세사르 차베스 고등학교 3학년이다.”(p21) 이 소설은 매우 흡입력 있게도 십대 남성 주인공 일인칭 시점으로 시작되며, 시종일관 이를 벗어나지 않는다. 소설의 내용을 매우 단순하게 요약한다면 한 명의 ‘소년’이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라 볼 수 있다.

이런 이야기는 새삼 설명할 필요도 없이 평범하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십대 소년이 삶의 소명을 받아들이고 세상을 주유하는 경우는 줄어들었다. 그러나 모든 시대 모든 문화권에서 소년·소녀들은 이러한 얘기를 즐겨왔다. 당장 올해 초 전 세계적으로 흥행을 한 영화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를 떠올려 보자. 한 명의 ‘소년’에게 ‘세상을 구해야 한다는 사명’을 주기 위해 얼마나 거대한 이야기가 필요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런 만큼 이 ‘평범한 이야기’는 각양각색의 시공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어 왔다. 그리고 이 ‘평범한 이야기’의 개연성과 재미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어떻게 설명하느냐에 따라 결정되어 왔다. ‘세상’엔 도대체 무슨 문제가 생기게 되었는지, 소년은 어떤 식으로 그 문제를 자각하게 되었는지, 소년은 어떤 난관을 딛고 자기 내면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마리를 얻게 되었는지 말이다. 《리틀 브라더》는 이 부분에서 매우 독특한 길을 나아간다.

9.11 이후 미국 사회의 상상력

“바로 그때, 세상이 영원히 바뀌었다.”(p50) 소설은 샌프란시스코 폭탄 테러 사건에서부터 요동친다. 테러 이후의 비상정국을 핑계로 한 국토안보부(Department of Homeland Security, DHS)의 인권침해와 기본권 위협이 바로 이 ‘세상’에 새로이 발생한 문제다. 국토안보부는 2001년 저 유명한 9.11테러 이후 미국 행정부 내의 각 부처에 분산된 대 테러기능을 통합하여 2002년 출범한 그 단체다. 22개 정부조직을 통합하여 전체 인원 17만 명에, 예산을 400억 달러나 쓴다는 이 단체가 소설 속에서 ‘소년’의 ‘주적’으로 설정된다.

이 소설에서 국토안보부는 특정 소수에 대해 불법적 인신구속과 고문을 자행하고, 불특정 다수에 대해선 광범위한 인터넷 검열과 정보기기를 활용한 사생활 정보 수집 그리고 수집된 정보를 활용한 불심검문 등을 시행한다. 테러 직후 국토안보부에 억류됐다 풀려난 소년은 ‘특정 소수’로서 그들에 대해 분노하고 ‘불특정 다수’의 권익을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일은 꼬여만 간다. 체제의 감시와 검열을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을 온라인에서 전파하지만 새로운 탈주방법이 생기면 더욱 강력한 통제의 방식이 다가온다. 소년의 사정을 정확히 모르는 부모님조차 그의 편이 아니다. 결국 이 경쾌한 소설에서 소년은 승리를 거두고 결말은 해피엔딩으로 치닫지만 그를 위한 지난한 과정은 현실사회에서 우리의 저항이 얼마나 견고한 덫에 걸릴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2008년에 나온 이 소설은 미국 사회의 관점에서는 ‘근미래 SF’이며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조지 오웰의 《1984년》의 ‘빅브라더’를 본딴 책 제목부터가 그 사실을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소설 내용은 애초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2001년 9.11테러 이후 반전된 미국 사회의 분위기에서 나온 상상력이 한국 사회에선 ‘오래된 현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감시사회’가 디스토피아적 전망이었다면, 한국에선 벗어던져야 할 구습이었다. 정부 수립과 전쟁 이후 북한이라는 ‘주적’에 의해 규정된 대한민국은 애초부터 ‘영원히 바뀐 세상’ 속에서 폭력적으로 구성원들을 대했고 그 체제에서 차츰 벗어나는 중이었다. 그러나 민주정부 10년 이후 돌아온 보수정부의 시대에서 ‘감시사회로부터의 탈피’는 일종의 역주행 페달을 밟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세상’의 조류가 앞서 나가기는커녕 한국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더욱 우울한 사실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의 현실

오랜 세월 동안 한국 사회에 인권의 표준 내지 모범으로 존재해왔던 선진국들도 격랑을 겪고 있다. IS(이슬람국가)는 그 테러활동으로 인해 세계인들에게 한국인의 ‘북한’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유럽의 극우파들은 이슬람이 유럽 사회를 점령할 거라 엄살을 부리고, 일본에선 IS의 참혹한 테러장면을 어린 학생들에게 교육시켜 물의를 빚고, 9.11 이후의 미국은 이미 애국법과 국토안보부를 준비했다. 이는 사실 한국 사회에선 꽤나 익숙한 풍경이다. 이제 우리는 경제규모가 남한의 1/30도 안 되는 북한에게 나라가 함락될지 모른다는 우익의 엄살을, 초등학생들에게 북한군의 잔혹한 만행을 교육시키는 가학성을, 국가보안법의 독소조항과 국가정보원의 활동을 선진국 시민들 앞에서 크게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리틀 브라더》를 미리 읽어본 한국 사회의 시민들은 당연히 이 사실을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한 영화사 대표는 “파라마운트에서 영화화하기로 했다는데, 파라마운트에 제안하고 싶다. 소설 속 현실이 근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의 현실인 곳이 대한민국이므로, 내가 한국영화로 먼저 만들어 시장반응을 테스트해보면 안 되겠냐고”(김유평, 영화 프로듀서/영화사 ‘Mo’better story’ 대표)라고 말한다. 시사프로그램 PD였던 이는 “읽으면서 동시에 소설의 한국 버전을 써내려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안주식, 전 ‘추적60분’ PD, 현 한국피디연합회장)고 했다. 배우와 활동가는 “가까운 미래의 샌프란시스코를 배경으로 하지만 지금 한국과 너무 닮아서 깜짝 놀라게 된다”(김의성, 배우)고, “태평양 너머 미국의 픽션이 아니라, 2015년 대한민국의 논픽션”(이종회, 진보네트워크센터 대표)이라고 했다. 북한에서 운영하는 “우리민족끼리” 계정을 RT하고 농담을 했다가 구속당했던 이는 “사람이 어떤 순간에 공포를 느낄까. 잘 굴러가던 자동차가 도로 한복판에서 시동이 꺼진다든지, 아니면 누구같이 평소처럼 SNS를 하는데 갑자기 집에 소환장 같은 게 날아온다든지”(박정근, 사진가 겸 인디앨범 제작자)라면서 자신의 경험을 곱씹는다.

그리하여, 막상 소설을 쓸 때엔 그 사실을 충분히 숙고하지 못했을 저자조차도 한국어판 서문에선 “2015년 ‘해킹팀’이라는 악명 높은 이탈리아 사이버무기 판매업체가 해킹을 당해 업체의 이메일과 고객파일이 인터넷에 공개됐습니다. 공개된 파일을 통해 이 업체가 그동안 오랜 기간 잔혹하게 인권 침해를 해온 에티오피아 같은 정부들에게 감시 도구를 제공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 업체의 최상위 고객 명단에는 놀랍게도 ‘한국’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라며 거든다. ‘소년’이 구해야 할 ‘세상’의 모습은 미국에선 ‘개연성’의 영역에 있지만 한국에선 ‘현실성’의 차원에 있다.

게임하는 젊은이들이 세상을 구원할지니

소년이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가 그토록 많이 범람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소년들은 세상을 구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그래서 많은 웃자란 소년, 그리고 다 자란 청년들은 현실세계에서 그러한 소명을 받을 길이 없다는 걸 알기에 그 거대한 이야기를 찾아 각자 자신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온라인 게임에 탐닉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게임을 즐기는 청년들이나 게임개발자들에 대한 시선은 결코 곱지 않다. 신의진 새누리당 의원의 발의로 2013년부터 논란이 된 게임중독예방법에서 게임은 마약, 술, 도박과 함께 4대 중독물질로 규정된다. 이에 대해 게임개발자들은 “우리가 마약상이란 말이냐”라며 분통을 터트리기도 했다.

하지만 《리틀 브라더》의 세상에서 게임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매체이면서 온라인세상에서의 경쟁력을 키우는 도구다. 주인공 마커스는 대체현실게임(ARG, Alternate Reality Game)과 실제액션롤플레잉 게임(Live Action Role Playing Game)을 즐겼고 그가 국토안보부의 관심을 피하기 위해 사용한 엑스박스는 애초에 “마메 혹은 메임이라고 부르는 다중 아케이드 기계 에뮬레이터(Multiple Arcade Machine Emulator)“(p123)를 사용하여 손쉽게 게임을 하기 위한 도구였다. 그는 일상생활에서도 학교의 감시를 피하고 게임을 즐기기 위해 보안을 뚫거나 안전한 암호를 만드는 문제에 탐닉했는데, 이는 그가 국토안보부에 대항할 때 유용한 지식이 되었다.

《리틀 브라더》는 기본적으로 디스토피아 소설이지만 희망을 주는 부분도 없지 않다. 우리는 정보기술 발달로 인한 디스토피아를 상상할 때 시민들이 거기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없을 거라고 단정한다. 하지만 고등학교에서부터 여러 감시체계를 무력화시키는 마커스와 그의 친구들의 행동을 보면 기술진보가 감시체계를 강화할지라도 그 기술에 익숙한 세대는 거기에서 쉽게 구멍을 찾아내리라는 낙관적 전망을 얻게 된다. “걸핏하면 다운되어서 마흔 살 이하 젊은이들이라면 결코 자발적으로는 사용하지 않을 마이크로소프트의 똥덩어리”(p35)를 욕하는 세대의 감수성은 ‘게임하는 젊은이들이 세상을 구원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엑스박스를 활용하여 엑스넷이란 ‘혁명의 진지’를 구축하기 전에 마커스는 “돈은 없지만 시간은 남아도는 아이들의 능력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마라.”(p121)라며 선언하는 것이다.

수학과 헌법, 문과와 이과가 통합되어야 하는 이유?


이와 같은 사정에 대해 문화학자 엄기호는 다음과 같이 날카로운 논평을 남긴다.

“(...) 모두가 자신의 권리를 자발적으로 헌납하는 상황에서 누가 맞서 싸울 것인가? 민주주의의 영웅? 공화주의의 수호자? 아니다. 자유를 공기처럼 마시던 사람들이다. 자유가 싸움으로 쟁취한 숭고한 어떤 것이 아니라 뒤죽박죽이고 엉망진창이지만 자신의 일상인 사람들이 이 상황에 맞설 수 있다. 지금의 청년들에게 온라인은 바로 이 엉망진창인 ‘자유’의 원체험 공간이다. 이 공간이 공격받을 때, 그들은 견딜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공간에서, 그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지식(수학, 암호와 프로그래밍, 게임을 돌리는 방식 등)을 무기로 맞서 싸운다.

그러나 그들에겐 다른 무기가 하나 더 있다. 그저 무정부적인 자유를 위해 맨 바닥에 헤딩하는 것은 아니다. 이 법의 유보, 예외의 법제화에 맞서는 유일한 길은 유보될 수 없고 파괴될 수 없는 법에 의지하는 것이다. ‘헌법’이다. 헌법은 모든 법의 상위법이자 동시에 그 사회의 바닥이다. 따라서 헌법을 아는 자만이, 헌법을 문자 그대로 믿는 사람들만이 삶과 세계의 파괴에 맞서는 ‘언어’를 가지고 분명하게 맞설 수 있다.

그러므로 앎이 세상을 구원한다. 헌법을 알고 수학을 알아야 한다. 헌법(으로 대표되는 인문사회과학)을 알아야 무엇이 위협당하고 파괴되는지를 알 수 있고 수학(으로 대표되는 자연과학과 공학)을 알아야 맞설 수 있는 기술을 가질 수 있다. 이 둘이 마주쳤을 때 앎은 자유의 기술이 된다. 헌법을 알고, 수학을 다룰 줄 아는 자, 그가 자유인이다. 문과와 이과가 통합되어야 한다면, 바로 이 이유일 것이다.“

엑스박스에 기반한 엑스넷에서 ‘마이키’란 아이디를 사용하며 국토안보부에 저항하던 마커스가 안전한 기자회견을 위해 온라인게임 속 공간에서 기자들을 만나 권리장전에 대해 발언하는 장면은 이 논평의 적절함을 보여준다. “제가 엑스넷을 사용하는 것은 자유와 미국 헌법을 믿기 때문입니다. 제가 엑스넷을 사용하는 것은 국토안보부가 우리 모두를 테러 용의자로 취급하며 샌프란시스코를 경찰국가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제가 엑스넷을 사용하는 것은 권리장전을 파기하는 식으로는 결코 자유를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p313) 그러나 마커스의 이와 같은 발언이 가능했던 이유를 생각해보면, 학교에서 헌법을 가르치며 토의하기는커녕 ‘국사’라는 이름의 편협한 틀의 과목을 무려 ‘국정’으로 운영하겠다는 한국 사회의 현실이 더욱 암울해진다.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은 《1984년》의 암울한 디스토피아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열일곱 살 소년도 바꿀 수 있도록 이미 준비되어 있는 세상의 방식 속에서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할지 묻는다. SF 작가 이서영씨의 평가대로 “저자는 ‘통제’가 무엇인지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

“소설 속의 세계는 개인을 완전하게 통제하려고 시도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주인공 마커스가 자신을 통제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통제당하지 않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자신의 통제권을 회복하기 위한 싸움이다. 주인공 마커스는 다양한 방식의 게임을 좋아하고, 이 소설은 서사의 액션게임처럼 움직인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베고’, ‘탈출하고’, 주인공에게 이입하게 만든다. 게임 진행 중에 롤러코스터 체험 코스가 들어 있는 것은 덤이다. 주인공은 전형적인 ‘소년’의 얼굴을 하고 있다. 억울한 게 있으면 손에 칼을 들고, 허공에 손을 뻗어서 나랑 같이 손을 들 동료가 있을 거라고 믿는, 아직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어서 용기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서사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장르의 문법을 따라가고 있다고 봐도 되겠다. SF 소설이 흔히 발전한 과학기술을 토대로 미래의 형상을 통해 경이감을 드러내는 방식을 택하는 데에 비해, 《리틀 브라더》는 현실의 기술들을 조합하여 서사를 엮어나가고 심지어 그 기술들 자체도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다. 경이롭다기보다 신난다!” (이서영, SF 작가)

그리하여 마침내, 이 책은 스스로 《1984년》을 극복하고, 그 너머로 달려간다. 그것도 아주 유쾌하고 흥겨운 방식으로! 책 속에서 주인공 마이키가 좋아하는 엠마 골드만의 구호는 가장 심플한 방식으로 그 극복의 방법을 상징한다. 우연하게도 혹은 필연적으로, 이 책을 번역한 역자 최세진씨가 썼던 저서의 제목이 바로 그것이다.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

SF 장르 전문 출판사 <아작>의 첫번째 책은 코리 닥터로우의 대표작 <리틀 브라더>이다. 2008년에 나온 <리틀 브라더>는 미국 사회의 관점에서는 ‘근미래 SF’이자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조지 오웰의《1984년》의 ‘빅브라더’를 본딴 책 제목부터가 그 사실을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국토안보부는 특정 소수에 대해 불법적 인신구속과 고문을 자행하고, 불특정 다수에 대해선 광범위한 인터넷 검열과 정보기기를 활용한 사생활 정보 수집 그리고 수집된 정보를 활용한 불심검문 등을 시행한다. 테러 직후 국토안보부에 억류됐다 풀려난 소년은 ‘특정 소수’로서 그들에 대해 분노하고 ‘불특정 다수’의 권익을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일은 꼬여만 가는데... 마커스와 그 친구들의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긴장감 넘치면서도 통쾌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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