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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작 책방

천선란 소설집 《어떤 물질의 사랑》 리뷰: 지울 수 없는 흑백 타투 같은, 2의 세계, 김창규

 

사변이 경계를 지워버리고 모든 장르가 서로 화기애애하게 구느라 바쁜 요즘, 글세계에서 작가의 색깔을 첫 모습과 주 종목으로 나누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천선란 작가는 2020년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에서 대상을 받았다. 한국과학문학상은 과학소설, 그러니까 SF 소설에 주는 상이다. 알다시피 작가를 알기 위해 그런 사실에 너무 집중하면 틀이 생긴다. 좋은 이야기를 찾아다니는 사람에게 틀은 아마도 도움보다는 해를 더 많이 줄 것이다. 피해를 받지 않으려면? 지금 당장 책을 열고 읽으면 된다.

 

하지만 조금 더 미적거리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

 

목차에서 이 작품집에 실린 8개의 글 제목을 잠시 들여다보면 적어도 세 개의 작품에서 하나의 숫자를 떠올릴 수 있다. <두하나>는 말할 필요가 없을 테고, <너를 위해서>는 ‘나’와 ‘너’를 상정한다. 그리고 <그림자놀이>. 그림자가 생기려면 광원을 가로막는 사물이 있어야 한다. 광원만으론 그림자를 만들 수 없다. 광원이 세계라면 사물과 그림자는 그 세계 안에 있는 ‘존재’들이다. 사물과 그림자는 한 쌍이어야 한다. 따라서 숫자는 2다.

 

이 작품집에서는 수많은 2를 찾아볼 수 있다. 단편집이 대개 그렇지 않으냐고 묻는다면, 천만에. 이 책에서 2는 구조와 직결되어 있다. <그림자놀이>는 한때 과거를 함께 했으나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상당한 거리가 생겨버린 2인의 얘기다. 한 사람은 억지로 가까워지려 노력하지 않고, 다른 한 사람은 마음만 먹으면 가까워질 수 있는 힘을 갖고 태어났다. 둘 중 한 사람은 인위적으로 ‘감정과 공감’을 절개해 버리지만, 현실 속의 통증클리닉이 그러듯, 고통 그 자체만 사라졌을 뿐 원인은 남아 본질적인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주인공 ‘이라’가 애써 외면하려는 노력을 보고, 그게 곧 지울 수 없다는 반증임을 안다. 그리고 아마도, 작가가 작품의 정서와 세밀하게 조각한 어휘의 부조를 제 손으로 배신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림자놀이>의 끝에 도달한들 가슴의 답답함이 눈 녹듯 사라지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그 2는 <너를 위해서>에서 갑자기 혈육과 생명의 의미(또는 역설, 또는 잔인함)를 툭 던지고는 <레시>와 표제작 <어떤 물질의 사랑>을 낳는다. 두 작품은 태생부터 ‘바깥’에 있는 존재를 이야기하고, 그 바깥을 강조하기 위해 ‘안쪽의 상황’을 촘촘하게 보여주고, ‘엄마’와 엄마가 사랑하는 존재를 이야기한다. 이 두 글을 모두 읽으면 ‘기시감’이라는 단어가 모락모락 떠오를 것이다. <레시>는 토성의 위성인 엔셀라두스가 주 무대고 <어떤 물질의 사랑>에서는 지구가 그런 무대에 해당한다. 하지만 글이 막바지를 향하면서, <레시>의 엔셀라두스는 엄마인 승혜에 의해 결국 인간이 사는 곳과 같으면서 그와 동시에 다른 ‘지구’로 확장된다. <어떤 물질의 사랑>은 이야기의 끝에서 새로운 2가 탄생하면서, 지구가 뒤에 남고 저 먼 바깥이 안쪽으로 활짝 열린다.

 

그렇게 <그림자놀이>와 <레시>와 <어떤 물질의 사랑>은 (심지어 목차 순서를 봐도) 바짝 달라붙어서 구조적인 다중우주를 이룬다. 다중우주란 크게 같고 은근히 다른 우주의 모음을 가리킨다. 세 작품 모두 관계와 외면, 이해와 오해에 관해 얘기한다. 그 2 곱하기 2 속에서 낯선 자와 익숙한 세계가 서로 거리를 좁히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면서 춤을 추고 있다. 세 작품은 구조가 비슷하고 등장인물이 겪는 고통과 치료의 양상까지 흡사하다. 하지만 셋을 나란히 겹쳐놓고 대차대조표를 만들어보는 순간, 세 개의 우주가, 꽤 무겁고 힘겹게 다중우주를 형성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미니 3부작’을 감상했다면 이제 조금은 숨을 돌리고, 가슴을 활짝 펴도 된다. <두하나>는 금세 알아챌 수 있는 은유와 선명하기 그지없는 서사가 장점이지만, 그 선명함이 작가 고유의 신선함까지 도달했는지는 의문이다. 반면 <검은색의 가면을 쓴 새>는 작가가 독자에게 조금 더 친절해보겠다고 마음먹은 듯, 그리고 작품 내내 호흡을 조절하겠다고 마음먹은 듯 소심하면서 탄탄한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드라이브>는 책의 첫 쪽부터 글을 꼭꼭 씹으며 달려온 독자에게 작가가 살짝, 아주 살짝 미소를 짓는 것처럼 그리 버겁지 않은 여운을 남겨준다. <사막으로>는… 내가 편집자라면 ‘작가의 말’ 자리에 이 글을 넣었을 것 같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단편집 <어떤 물질의 사랑>이 첫 장을 넘기기보다 이 글 토막을 먼저 보는 독자가 있다면 <사막으로>를 가장 나중에 읽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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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집에는 매끈하니 누구나 수집하고 싶은 조약돌이 있는가 하면, 손을 대는 위치에 따라 다칠 수도 있는, 한 귀퉁이가 살짝 깨진 기암도 있다. 유독 그런 기암에 해당하는 작품은 <레시>와 <그림자놀이>이다. 천선란 작가는, 적어도 이 작품집 안에서는, 궁금증이나 호기심으로 독자를 결말까지 유인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시>와 <그림자놀이>에서 끝마무리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기는 어렵다. 작가는 할 얘기를 다했건만 그 끝은 깨져있다.

 

그래도 작가는 다른 힘으로 (힘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묵묵하고 끈기 있게 깨진 부분을 메꿔나간다. 그 힘은 핍진에 있고, 고통과 회피 속에서도 절대 눈감지 않는 시선의 날카로움에 있다. 그 두 가지는 지울 수 없는 흑백 타투처럼 읽는 이의 가슴에 진하게 남는다.

 

그게 천선란 작가의 선택이다. 그 선택의 결과 외계인과 바이러스와 초능력 등이 클리셰처럼 등장했다가 투명하게 사라지고 이중삼중의 은유로 작동하진 못했지만. 글머리에서 SF라는 단어 때문에 틀부터 세우지 말라고 전제했던 이유다.

 

그리고 아마, 천선란 작가가 둘 중 하나만 선택하지 않고 (또는 희생하지 않고) 둘 모두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할 가능성 역시, 모순되게도 그 힘에 있을 터다. 양손검을 천 번 만 번 휘두르다 보니 어느새 양손검뿐 아니라 두 개의 한손검까지 능숙하게 다루고 마는 작가가 간혹 있다. 천선란이 들고 휘두른 양손검의 날 끝에서, 거기 실린 힘에서 그 가능성을 본다.

 

- 김창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