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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작 미디어

[칼럼 SF 완전사회. 4]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사악한 생각, 강현

 

"이거 사람 고기네요."

 

Q 세상에서 가장 윤리적인 고기는?

A. 배양육이지.

Q. 배양육이 더 윤리적이려면?

A. 세포기증자에게 허락받은 배양육이면 돼.

Q. 그게 뭔데?

A. 사람 배양육!

 

네? 심너울의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에 실린 단편 <한 터럭만이라도>의 내용은 시작부터 경악스럽다. 잠깐 멈춰서 반박하려고 하다가 멍해진다. 그 고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아무도 죽지 않았다. 살해도 아니고, 상해도 아니고, 고통도 없고, 아무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모두가 만족한다. 기증자가 자발적이기까지 하다. 아니 근데 진짜 누가 그걸 먹어요. 근데 그걸 다들 먹는 세상을 뻔뻔스럽게 전개하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황당함은 가시고 납득 되기 시작한다. 같은 책에 수록된 단편들도 유쾌하다. 그리고 경악스럽다.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 놓고선 눈알을 굴리며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항상 이랬다는 태도를 고수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들이 여전히 당연한가? 어떤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가? 어떤 것이 뻔뻔스럽게 ‘난 당연한 거야’라고 주장하고 있는가?

 

SF는 당연한 것과 당연하지 않은 것을 반전시키곤 하는 흥미로운 사고실험이다. 그 배경으로는 꽤 자주 디스토피아나 아포칼립스가 나왔던 것 같다. 망한 세계. 정확히는 어느 행성의 우리 비슷한 것이 여기쯤에서 뭘 잘못했기 때문에 저기쯤에서 망한 세계. 어디서는 핵으로 멸망했다. 어디서는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했다. 어디서는 인공지능의 노예가 되었다. 과도하게 잘 살고 싶었던 나머지 우리 스스로를 개조하느라 우리가 누군지 스스로 못 알아보게 되었다. 질병이 휩쓸었다. 군부 독재 시대가 되었다. 이번에 내가 고른 작품은 유토피아인가 해서 보면 와 그보다 우리의 인권이 교묘하게 침해받는 사회도 없겠다 싶다.

 

SF는 미래를 새로 그린다. 실은 과거를 덧그리기도 하고, 아주 다른 현재를 그리기도 한다. 왜 우리는 그렇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새로 그리기를 좋아할까? 우선 당연히 재밌어서다. 그런데 그거 말고는?

 

나는 세계 여성 페미니즘 SF 걸작선 《야자나무 도적》에 실린 어슐러 K. 르귄의 <정복하지 않은 사람들>을 통해서 기록은 없지만 어딘가 존재할지도 모르는 여성들의 역사를 읽었다. 자연을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관찰자의 시선으로 겸허하게 즐기다 온 사람들의 관점을 경험했다. 과거의 사람들이 미지의 세계에 발을 디디는 순간을 나도 느꼈다.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 것들로부터 위로를 받고 희망을 품었다. 난 그게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가 나한테 그랬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단지 대리만족이 전부냐고. 사실 적시 대신 회피하는 게 아니냐고. ‘너는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 과거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 20세기의 가정주부들이 몰래 남극을 탐험한 일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어.’ 나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답을 하기 위해 애써야 했다.

 

같은 책에는 반다나 싱의 단편도 나온다. 반다나 싱의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에서 카말라는 사리를 입고, 남편과 가정을 돌보고, 향수를 뿌리고 헤나로 물들여 깔끔하게 쪽을 진 머리를 해야 하는 부인이다. 그게 당연한 세상에 사는 여자. 그런데 어느날 카말라는 자신이 행성이란 걸 깨닫는다. 그래서 카말라는 자신은 더 이상 인간의 규칙, 인도인 아내의 규칙과 관습을 따를 필요가 없으며 자신은 행성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고 남편에게 말한다. 우선, 행성은 사리를 입지 않는다.

 

어떤 것들이 여전히 당연한가? : 카말라는 람나스 미슈라의 부인이다.

어떤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가? : 카말라가 인도인 아내의 전통적인 본분을 다하지 않는다.

어떤 것이 뻔뻔스럽게 ‘난 당연한 거야’라고 주장하고 있는가? : 카말라는 행성이다. 그래서 인간이 아니라 행성의 본분을 다할 것이다.

 

이제 문장을 다시 바꿔 써보자. 누가 아내의 전통적인 본분을 정했나? 그것이 완전히 합당하고 논리적인 유일한 선택이었을까? 우리 세계가 뻔뻔스럽고 당연하게 ‘아내의 전통적인 본분’을 주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제 누가 SF 세계일까. 우리 역시 SF 세계 중의 하나라고 결론 내리는 순간, 우리는 그 장난스러운 결론에 꽤나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SF의 ‘사고실험 세계’를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건 자기만족 이상이다. 우리는 그 사고실험으로 우리 우주가 실은 다른 종류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전혀 다른 결과를 내놓을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현재의 세계가 하나의 패러다임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지금의 우리 세계는 어떤 절대적인 진리에 의해 당연히 귀결될 수밖에 없었던 하나의 세상이 아니었다. 실은 수많은 관점에 의해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는 세계였다.

 

사회는 관성에 의해 움직인다. 웬만한 충격 없이는 자신이 겪었던 궤도를 따라서 그대로 관성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SF는 궤도를 계속해서 수정한다. 과거의 궤도이든, 현재의 궤도이든, 미래의 궤도이든. 수천, 수만 가지의 궤도를 현실 위에 덧그린다.

 

 

 

다시 <한 터럭만이라도>로 돌아가면, 대중에게는 ‘과학기술이 사회를 형성한다’는 오랜 믿음이 있다. 그 믿음은 날이 갈수록 강해진다.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 머신러닝이라는 말이 없으면 대학에서 경영대 강의를 새로 만들어주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과학기술이 변화시킬 미래사회에 대해서 아주 완벽히 파악하기 위해 열심이다. 우리 우량주 목록에 테크주가 얼마나 있나. 우리는 당연하게 과학기술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특히 돈을 버는 추동력이라고 믿고 그것은 대부분 맞다.

 

그런데 과학기술이 사회를 형성할 뿐만 아니라 사회 역시 과학기술의 방향을 결정한다. 우리는 윤리를 위해서 ①채식, ②햄철이 들어간 식물성 고기완자, ③배양육 중에 어느 것을 더 선호할까? 그게 우리가 어디에 돈을 투자하고 기술을 발전시킬지 결정한다. 우리는 대체육이나 다른 궁극적으로 환경이 더 나아지기 위한 실험을 위해 동물들이 희생되는 것을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떤 기업들은 시민들의 항의메일과 시위를 경험할 것이다. 어떤 기업이 남고, 어떤 기업이 사라질 지도 사회가 결정한다. 우리는 어디까지 우리의 신체를 상품으로 여기고 어디까지를 우리의 인권으로 여길까? 우리 신체가 시장에 얼마나 팔릴지 사회가 결정하는 순간 우리의 신체를 필요로 하는 과학기술이 얼마나 발전할 수 있는지, 어느 방향으로는 기술 발전에 핸디캡을 갖고 어느 방향으로는 장려될지가 결정된다.

 

 

몇 번의 논리적 과장을 허용하자면, 우리의 미래는 과학기술이 결정한다. 그리고 그 과학기술의 방향은 우리가 얼마나 사회에 대해서 깊이 있게 논의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아무도 망한 세계에 살고 싶진 않다. 그렇지? 정확히는 지구의 우리가 여기쯤에서 뭘 잘못했기 때문에 저기쯤에서 망한 세계에 살고 싶지 않다. 그렇게 아포칼립스나 디스토피아가 되는 수많은 선택지를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SF를 읽는다. 과장인가? 하지만 재밌으니까 괜찮다.

 

SF 속의 다양한 사고실험들은 미래에 관한 논의를 한층 더 깊고 풍부하게 한다. ‘그 미래가 우리 자신에게 달렸다’는 말은 일견 진부하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로 게으르다. 너무 게을러서 문제가 바로 내 밑창과 발바닥 사이에 들어간 돌처럼 발밑을 쑤시지 않는 다음에야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다른 관점을 살펴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채식이나 배양육이나, 우리가 당장 10년 후에 살아갈 기후 변화에 대해서 내일 점심만큼도 고민하지 않는다. 그렇게 판단과 결정을 유보하고 남들의 몫으로 떠넘긴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런 식으로 우리는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을 내 손에서 떠나보내고, 원하지 않았던 결과를 마주하고 나서야 후회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저절로 되지 않네.’

 

그러지 않으려면 생각을 해야 한다. 어떤 것들이 당연한지, 지금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외에 다른 것들이 당연하다면 세상이 바뀔지. 디스토피아라는 관념 없이 유토피아는 있을 수 없다. 오늘도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사악한 생각을 하자. 당신이 SF의 우주를 여행할 때, 우리와 가장 멀어 보이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 자신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강현, 소설가

1996년 제주에서 태어났고, 한양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친한 친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 소설 <나는 바나나다>를 썼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때 글을 쓴다. 근래 생각하는 주제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글을 쓰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누가 알아주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사악한 생각을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