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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SF 완전사회. 2] 바로 지금 멋지게 해야 할 일 by 이산화

아작 미디어

by arzak 2020. 9. 1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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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지금 멋지게 해야 할 일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본명 앨리스 브래들리 셸던)의 단편 <마지막으로 할 만한 멋진 일>은 언제 읽어도 매혹적이지만, 요즘처럼 전염병 재난을 피해 집구석에 가만히 틀어박혀 있어야 할 때는 더더욱 꺼내 읽고 싶어지는 작품이다. 우주여행이 보편화되었지만 여전히 곳곳에 미지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미래를 배경으로 하여, 이 소설은 통제 불가능한 외계 기생생물 포자가 야기할 재난을 막아내기 위해 힘을 합치는 두 모험가의 고군분투와 우정을 그린다. 물론 소수의 영웅이 위협적인 전염병 문제를 한순간에 깔끔히 해결한다는 내용만으론 어쩐지 얄팍한 현실도피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현실에선 그런 소수의 영웅들이 지쳐 쓰러진 뒤로도 최소한 몇 년 동안은 인류가 코로나바이러스와 불편한 공존을 지속해야 할 모양이니 말이다. 하지만 참으로 시의적절하게도, <마지막으로 할 만한 멋진 일>은 팬데믹의 위기를 헤쳐나가는 영웅들의 이야기인 동시에 인간과 전염병 간의 공존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설을 이끌어나가는 두 영웅 중 하나는 다른 생물의 뇌에 기생하는 지성체 미생물, ‘이아종족의 일원인 실료빈이니까.

 

동족 몰래 통신관에 올라타고서 우주 공간으로 모험을 떠난 어린 기생생물 실료빈은, 자신처럼 몰래 우주선을 몰고 나온 대담한 인간 소녀 코아티 캐스의 머릿속에 우연히 자리를 잡는다. 생물학적으로는 지극히 멀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닮은꼴인 두 인물은 서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빠르게 공감대를 형성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슴 벅찬 우주여행을 함께하는 최고의 친구이자 동료가 된다. 그런 둘을 위협하는 최대의 난관은 얄궂게도 실료빈이 속한 이아종족의 생물학적 본능 그 자체. 동족으로부터 번식 본능을 통제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어린 이아는 이성을 잃고 숙주에게 해를 끼치는 것으로도 모자라 사방으로 감염성 포자를 뿌리고 만다. 이대로 우주선을 기착지까지 몰고 갔다가는 외계 기생생물의 대유행을 피할 수가 없는 상황. 시시각각 다가오는 재난을 어떻게든 막기 위해 코아티와 실료빈이 감행하는 마지막으로 할 만한 멋진 일이 과연 무엇인지, 그 자세한 내용은 직접 읽고 확인하시길.

 

사랑은 운명, 운명은 죽음

 

팁트리 주니어는 육체적 욕구에 휘둘리는 생명체들의 이야기를 중요한 글감 중 하나로 삼은 작가다. 이를테면 작가의 대표작이자 페미니즘 SF의 고전이기도 한 <체체파리의 비법>에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욕이 살의로 뒤바뀌는 기이한 증상이 등장하며, 작중에 등장하는 대다수의 남성은 이 증상에 조금의 저항조차 없이 휩쓸려 여성 살해에 모든 것을 바친 광신자로 전락하고 만다. 한편 <사랑은 운명, 운명은 죽음>은 거미를 닮은 외계 생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애틋한 로맨스인데, 여기에서 두 인물의 사랑을 가로막는 결정적인 요소 또한 짝짓기 후에 반려자를 잡아먹도록 유도하는 이들 종족의 태생적 충동이다. 인간을 우주 먼지처럼 취급하는 호러 장르의 한 갈래인 코즈믹 호러(Cosmic Horror)라고 할 만한 작품 <덧없는 존재감>에서도, <그리고 깨어나 보니 나는 이 차가운 언덕에 있었네>와 같은 짤막한 스케치에서도 어김없이 등장인물들은 불길처럼 치솟는 생물학적 충동에 정말이지 온갖 방식으로 휩쓸리고 또 휩쓸린다. 때로는 저항하려고 애써 보기도 하지만 그 저항은 대체로 더욱 비극적인 결말을 낳을 뿐이다. 유전자에 새겨진 명령이 몸을 사슬처럼 옭아매고서 무자비하게 짓누르는 동안 대다수의 등장인물은 결국 운명에 속절없이 굴복하고 만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할 만한 멋진 일>에서는 조금 다르다. 비록 실료빈 또한 기생생물 종족의 무자비한 번식 본능에 사로잡힌 신세라는 점에선 다른 단편의 등장인물들과 매한가지 신세이지만, 그럼에도 실료빈은 작품의 마지막 순간까지 치밀어오르는 본능에 굴복하지 않고 어떻게든 맞서 싸우는 데에 성공한다. 그리고 실료빈의 내면에서 일어난 작은 승리는 곧 외계 전염병으로 인해 펼쳐질 뻔한 재난을 막아내는 영웅적인 업적으로 이어진다. 이 단편이 특히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잔혹한 생물학 원리가 지배하는 팁트리 주니어의 작품 세계에서 실료빈만은 절대적인 것처럼만 보였던 생물학적 장벽을 뛰어넘어 인간과 친구가 될 뿐만 아니라, 자신의 파괴적인 본능으로부터 친구의 동족을 구해내는 데에도 성공하는 것이다. 숙주의 종족을 위해 몸 바쳐 헌신하는 기생생물이라니, 현실의 생물학적 재난 국면 한가운데에서 읽기에 참으로 꿈 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동시에 실료빈의 승리는 우리의 현실을 파먹어가는 다른 한 가지 종류의 고약한 전염병에 대한 승리이기도 하다. 소설 속의 인간과 외계생물이 아득히 다른 몸의 형태를 초월하여 대화를 나누고 서로를 알아가며 동료애를 쌓는 동안, 현실에서는 그보다 훨씬 사소하기 그지없는 생물학적 차이를 핑계 삼아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억압하는 일이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으니까.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인해 백주대낮에 살해당한 사건은 미국 전역으로 확산된 인종차별 반대 시위로 이어졌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혐오와 범죄는 하루라도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날이 없는 지경이고, 그런 와중에 정의당의 장혜영 의원이 발의한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국회 청원은 무려 10만 명의 동의를 얻어내기까지 했다. 이 모든 사회병리적 현상의 뿌리 근처에는 인간과 동물, 여자와 남자, 정상인과 비정상인을 나누는 데에 골몰하여 온 근대 과학자들의 차이의 생물학이 자리 잡고 있다. 그들은 겉으로는 이성과 객관성과 기치로 내걸었으나 실제로는 백인이 유색인종보다 우월하며 남성이 여성보다 지적으로 뛰어나다고 말하는 것을, 비좁은 정상성의 경계선을 벗어나는 모든 것이 곧 비정상이자 기형이라고 낙인찍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러한 차이의 생물학은 사회에 만연한 차별과 혐오를 합리화하는 지리멸렬한 논거로서 지금껏 기능해 왔으며, 때로는 오로지 타자를 짓밟기 위해 만들어진 악랄한 사상의 밑받침이 되어 주기도 했다.

 

그 모든 차이와 편견을 넘어서

 

소수자를 멸시하고 해치며 끊임없이 주변부로 밀어내는 사회의 압력은 팁트리 주니어의 또 다른 주요 글감이기도 했다. 그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비단 움직이지 않는 생물학적 원리로부터만이 아니라 작중 사회를 지배하는 차별적 이데올로기로부터 또한 고통받는다. 인간에게 붙잡혀 노예 취급을 받는 외계 종족을 다룬 <별의 눈물>이 그러하고, <접속된 소녀><돼지제국>에서는 외모가 따돌림과 폭력의 핑계가 되며, <서쪽으로 가는 배달 여행> 또한 정상성에서 벗어난 사람에 대한 폭력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작품에 전반적으로 깔린 또 하나의 차별은 <보이지 않는 여자들>이나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에서 우스꽝스럽게 그려진 것처럼 얄팍하기 그지없는 남성들의 젠더 관념이다. 그러나 이처럼 사방이 촘촘한 편견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코아티는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온 낯선 존재에게 마음을 열고, 실료빈은 새로 사귄 친구를 위해 전력으로 자신의 본능을 억누르려 한다. 숙주의 몸속에 자유로이 파고들 수 있는 이아 종족의 생태에 대해 알게 된 코아티가 너희들은 온 연방을 돌아다니며 아픈 사람들을 찾아가 치료해줄 수 있을 것이라며, 나아가 모두가 너희들을 사랑할 거라며 기뻐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팁트리 주니어의 단편 속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이나 다름없는 독자들에게 더더욱 각별한 울림을 선사한다.

 

SF는 재난을 그리기에 적절한 장르이고, 그렇기에 어떤 작품들은 다가올 재난에 대한 사실적인 예언이나 경고로 읽히기도 한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작품들 또한 마찬가지다. <체체파리의 비법>은 여성 살해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회자되는 작품이고, 전 지구적 환경 문제가 이슈가 될 때면 <아인 박사의 마지막 비행>이 제시하는 고요한 복수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한편 팬데믹과 차별과 혐오의 몇 겹 재난에 직면한 우리에게는 <마지막으로 할 만한 멋진 일>이 있다. 비록 우리는 생물학적 원리의 냉엄한 장벽 앞에서 한없이 나약한 존재이고, 또 서로의 아주 사소한 차이를 트집 잡아 유사 이래 끊임없이 서로를 해쳐 온 존재이지만, 그 모든 차이와 편견을 넘어서는 연대의 가능성이 이 단편 속에는 있다. 두 우주 모험가의 영웅적인 마지막으로 멋지게 할 만한 일은 그렇기에 우리가 바로 지금 멋지게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본 글의 요약본은 전자신문 [SF 完全社會]바로 지금 멋지게 해야 할 일 에 수록되었습니다.

 

이산화, 소설가

 

GIST에서 화학을 전공하였고, 같은 곳의 대학원에서 물리화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온라인 연재 플랫폼 브릿G에서 <아마존 몰리>20172분기 출판지원작에 선정되며 작가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이후 <증명된 사실>2018SF어워드 중단편소설 부문 우수상을 수상하였다. 소설집 증명된 사실과 사이버펑크 장편 오류가 발생했습니다SF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고, 최근 액션 스릴러 장편 밀수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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