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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D. 제임스, 《사람의 아이들》리뷰 : "어린이가 사라진 세계" by decomma

아작 미디어

by arzak 2021. 9. 25.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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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새해 첫날, 자정에서 막 3분을 넘긴 늦은 시간에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외의 한 술집에서 소동이 일어나, 지상에 마지막으로 태어난 인간이 252개월 12일을 살다 살해당했다.

- P. D. 제임스, 사람의 아이들

 

팬데믹이 강타한 2020년은 여러 측면에서 전 세계적으로 충격적이었지만, 대한민국 인구사에서도 변곡점을 찍은 한 해로 기록될 듯하다. 2021년 새해가 밝자 언론들이 앞다투어 쏟아낸 기사는 이랬다. “대한민국 주민등록인구가 통계 작성 이후 처음으로 자연 감소!” “신생아 30만 명 선마저 붕괴!” “15년간 저출산 대책에 225조원을 썼지만.”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져서 기억을 더듬어보니 두 해 전 한국어판을 낸 사람의 아이들의 첫 문장이 그랬다. 어쩌다 하필 소설의 배경도 2021년이었는지. 당시에 내가 쓴 보도자료는 지금 보니 조금 신이 난 것 같은 말투다. “인류가 마침내 재생산 능력을 잃어버리고 완전한 불임이 되었다!”

 

그동안 팬데믹에 대한 우려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지만 막상 일이 닥치고 보니 그 누구도 제대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음을 실시간으로 목도한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에서 가장 먼저 접어든 0명대의 출산율과 OECD 평균 대비 4배 빠른 고령화라는 한국의 현실은 나도 모르게 소설의 한 페이지 속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다.

 

사람의 아이들에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인류는 재생산 능력을 잃은 지 오래다.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태어났다고 알려진 25세 남자가 살해된다. 이제 25세 이하의 인간은, 어린이라는 존재는 이 세계에서 공식적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여전히 노력은 하지만, 인류는 치욕스럽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소멸에 적응해간다.

 

먼저 공원의 놀이터가 철거되었다... 그네는 모두 단단히 줄로 묶여 고정되었고, 미끄럼틀과 정글짐은 더 이상 새로 페인트칠을 하지 않은 채 방치되었다. 그러다 종내는 없어졌다. 아스팔트를 깐 놀이터도 작은 공동묘지처럼 잔디로 덮거나 꽃을 심어버렸다. 장난감은 모두 불태웠다.

- P. D. 제임스, 사람의 아이들

 

사실, 인류의 멸종은 SF에서 흔히 다루는 소재다. 아예 종말 이후의 세계를 다룬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하위 장르를 형성할 정도이기도 하거니와, 미래에 대한 상상이라는 장르의 일반적인 특성으로만 보아도 인류의 멸망이라는 이야깃거리는 피할 수 없다.

 

SF 작가들이 그리는 인류 멸종은 전면적 핵전쟁이나 전염병, 기후 변화에 따른 자연재해, 거대 운석의 충돌처럼 흔한 것에서부터, 미래 인류가 보내온 거대 지렁이가 지구상 모든 인공물을 먹어치운다거나(정세랑의 <리셋>), 남자들로 하여금 여자를 죽이게 만들어 인류 스스로 멸종하게 하기도 하는 등(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나사파리 구제법>) 등 다양하다. 그 원인과 줄거리는 달라도, 대체로 인류의 멸종은 폭력적이고 즉각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런 점에서 사람의 아이들은 조금 특별한 소설이다. 작가는 인류의 소멸 과정을 평화롭고 조용하며, 또 느리게 보여준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동명의 영화 <칠드런 오브 맨>(2006)에서 보여준 것처럼 인류를 구원하는 영웅적 서사도 소설에는 없다. 국가를 구원하겠다는 독재자도, 그에 저항하는 일군의 무리도, 심지어 이런저런 소소한 고난 끝에 새로운 인류의 싹을 구출한 주인공마저도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세속적인 존재일 뿐이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이 소설의 매력이 있다. 작가의 다른 작품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의 마지막 장면이 그러했듯이, 인간이 얼마나 편협하고 비루한 존재인지를, 스스로의 존엄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때조차 그 비루함과 유혹 속에서 끝없이 갈등하는 존재인지를 P. D. 제임스는 말년에 쓴 단 한 편의 SF 사람의 아이들을 통해 보여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겨우 이런 사람들일 것이다. 처음과 같이,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갑작스럽게 발기불능이 찾아온 음탕한 호색한처럼 우리는 내면에 간직한 신념의 한가운데에 큰 상처를 입고 모멸감으로 괴로워하고 있다.

- P. D. 제임스, 사람의 아이들

 

- 《월간 책》 2021년 3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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