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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 브래드버리, 《화씨 451》& <미소> 리뷰 : “불태우는 일은 즐겁다” by decomma

아작 미디어

by arzak 2021. 9. 26.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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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숱한 멍때리기 중 불멍이 가장 즐거운 일임에는 틀림없지만, 직업이 불을 지르는 것이라면 사정이 조금 다를 것이다. 게다가 그 방화의 대상이 책이라면? 레이 브래드버리의 소설 화씨 451의 배경은 책을 읽는 것도, 소유하는 것도 금지된 미래사회, 말 그대로 모든 책이 불법이다. 책을 소유했다가 적발되면 집도 함께 태워버린다. 그리고 그렇게 정의의 이름으로, 합법적으로 책을 불태우는 방화수(放火手, fireman) 가이 몬태그가 주인공인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불태우는 일은 즐겁다.’

 

하지만 방화수 몬태그는 책을 태우는 일이 그저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비단 불태우는 일이 직업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무엇인지도 모를 책을 집과 함께 태워버리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의문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겁니까?

세상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책들이 우리에게 도움이 됩니까?”

 

과연 책에 뭐가 있길래, 이렇게 다 불태워 없애버려야 하는지 의문을 갖게 된 주인공은 몰래 책을 한 권씩 훔쳐서 빼돌리기 시작하다 결국 책을 태워 없애는 사회 그 자체를 전복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화성을 노래하는 음유시인이라 불리며, SF 작가로서는 이례적으로 전미도서상까지 수상한 바 있는 레이 브래드버리가 1953년에 발표한화씨 451은 책이 금지된 디스토피아를 그렸지만, 다소 역설적으로, 출간 70년이 되어가는 현재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힌 SF 중 하나로 손꼽힌다.

 

사실 분서갱유의 실체를 들여다본답시고 굳이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다. 20세기 후반 중국 대륙을 휩쓸었던 문화대혁명을 봐서도 알겠지만, 사실 정의의 이름으로태워 없앨 것이 어디 책뿐이겠는가. ‘단편의 제왕으로도 유명한 레이 브래드버리가 화씨 451을 출간하기 전인 1952, <판타스틱 매거진>에 발표한 단편 <미소>(소설집 온 여름을 이 하루에수록)는 그림이 금지된 사회를 그린 소설이다.

 

작품의 배경은 2061, 이 사회 역시 엉망진창이다. 도로는 폭격을 맞아 울퉁불퉁해졌고, 도시는 쓰레기 더미가 되었으며 농경지는 방사능으로 번들거린다. 살아 남은 사람들은 동굴 속에서 추위에 떨며 굶주린 채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이제 사람들을 지탱하는 건 과거에 번창하였으나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망쳐버린 이들에 대한 미움뿐이다.

 

그리고 그 미움을 표출하는 방식은 이전 세대가 남겨 놓은 모든 문명의 자취를 부숴버리는 것이다. 광장에 모여 모든 책을 찢어발기고 불에 태우며, ‘과학 축제때는 마지막으로 남은 자동차를 끌고 와서 대형쇠망치로 부수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 선조들이 남긴 위대한 그림이 있다.

 

사람들은 이 위대한 그림에 정확히 말 그대로 아주 정확하고 깔끔하게 침을 뱉기 위해새벽 5시부터 광장에 꾸역꾸역 모여 든다. 그리고 경찰이 그림을 성난 군중에게 넘기는 순간, 사람들은 그림에 침을 뱉다 못해 굶주린 새 떼처럼 손으로 그림을 쪼아대고 캔버스 조각을 이로 물어뜯고 액자를 부순다.

 

저걸 뭐라고 부르나요, 아저씨?”

톰이 조용히 물었다.

저 그림 말이냐? 아마 <모나리자>일 거다. 그래, <모나리자>.”

 

화씨 451에서 방화수 몬태그가 자기가 불지르는 집에서 책 한 권을 훔치듯, <미소>의 주인공 소년 톰은 그림에 침을 뱉으러 나갔다가, 찢어진 그림의 한 조각을 손에 넣어 몰래 집으로 가져온다. 그리고 달빛 아래 온 세상이 잠든 밤, 소년은 모나리자그림의 한 조각을 몰래 펴서 감상한다. 이제 소년의 손 안에는 미소가 담겨 있다. 눈을 감아도 어둠 속에 그 미소가 그대로 떠오를 만큼 따뜻하고 다정한 미소. 작가의 희망대로 소년은 이제 어떤 상황에서든 아름다운 것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것들을 볼 수 있는 영혼을 가진 자가 나타날 거야. 어느 정도는 우리에게 되돌려줄 거야.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그런 문명 말이지.”

 

-《월간 책》 2021년 7, 8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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