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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혜 『궤도의 밖에서, 나의 룸메이트에게』 리뷰: 태초에 이별이 있었다 by decomma

아작 미디어

by arzak 2021. 12. 1.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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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사랑이 먼저일까 이별이 먼저일까를 묻는다면 무슨 귀신 싸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웃을지 모르겠지만 태초에는, 분명 사랑보다 이별이 먼저 존재한 것 같다. 전삼혜 연작소설집 궤도의 밖에서, 나의 룸메이트에게를 관통하는 하나의 문장을 고르라면 단연코 나는 이 문장을 택하고 싶다.

 

태초에 빅뱅이 있었고 다음 순간 모든 것이 서로 멀어졌다.”

 

무릇 진정한 사랑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그리고 그 세계는 바로 이별의 세계다. 연작소설 혹은 장편소설로 확장되기 전, 전삼혜가 단편 창세기를 통해 선보인 제네시스의 세계 역시 사랑보다 이별이 앞선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다시 엮인 등장인물들의 연대기는 그 자체로 장대한 이별 연습에 가깝다.

 

궤도의 밖에서, 나의 룸메이트에게문라이터를 통해 달을 광고판으로 쓰는 회사 제네시스에 소속된 제네시스의 아이들의 이야기다. 달을 광고판으로 쓴다니, 오래전 그러니까 70년 전에 로버트 A. 하인라인이 발표한 달을 판 사나이의 한 장면 같기도 하지만 달을 판 사나이에서 D. D. 해리먼 씨가 이후 인류의 우주 개발에 선두에 선 것과 대조적으로, 달 광고판을 통해 막대한 돈을 벌게 된 제네시스는 소행성 충동을 막고 지구를 살리느라 안간힘을 써야 한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20세가 채 되지 않은 아이들이 있다. 소설은 그 아이들의 이별 이야기다. 혹은 그래서 사랑 이야기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데는 사실 큰 이유가 필요치 않다. 그저 머리카락 색이 마음에 들어서일 수도 있고, 자신의 눈동자 색을 처음으로 궁금해해준 사람이어서일 수도 있고, 마치 알에서 갓 부화한 새끼 오리처럼 부모와 다리를 잃은 자신에게 처음 손을 내밀어줬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제대로 된 이별을 하는 데에는 더 많은 이유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이별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이별을 통해 너와 나는 헤어지게 되는 것이지만, 그 이별을 통해 비로소 세상의 모든 에게로 와서 하나의 세계가 된다. 그리고 그 세계는 거대한 폭발을 시작한다. 빅뱅!

 

오랫동안 청소년들을 위한 SF를 써온 작가 전삼혜가 그리는 이별 이야기 궤도의 밖에서, 나의 룸메이트에게는 그래서 더 모든 이들이 읽으면 좋을 절절한 사랑 이야기다. 소행성 충돌을 앞둔 혼돈의 시기에 사람들은 저마다 최선을 다해 아름다운 이별을 선택한다. 그 방식은 사랑하는 이를 안전한 곳에 몰래 보내는 일일 수도 있고, 도서관에서 책 두 권을 빌려 오고 우유를 사 오는 일상일 수도 있고, 그저 행운을 빌어주는 기도가 되기도 하지만, 작가의 바람은 조금 더 따듯하고 간절하다.

 

이 말을 누군가와 나눴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귀에 대고 속삭이고 싶다. 나는 팽창하지 않는 우주를 원해.”

 

그러나 어쩌겠는가. 팽창하지 않는 우주라니, 세계가 존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멀어지기 시작한걸. 그런 세계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곁을 내어주는 일이지 않겠는가. 2015년 발표 이후 많은 독자들이 사랑해온 창세기의 문장 그대로.

 

너는 나의 세계였으니, 나도 너에게 세계를 줄 거야.”

 

- 월간 chaeg, 2021년 11월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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