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을 쓰면서야 생각이 났는데, 이 책은 첫 단편집을 내고 8년 만에 내는 단편집이다. 작가로서 글을 써 온 기간에 비하면 단편을 많이 쓰지 않았던 것인가 싶다가도, 그동안 앤솔러지며 청탁이며 이런저런 일들로 써 온 단편들을 헤아려보니 그렇지만도 않았다. 역시 내가 게으른 탓이었나, 다시 생각해본다.
<나와 세빈이와 흰 토끼 인형>은 인간이 언젠가 본격적으로 의체를 쓰게 되면 우리가 이 의체를 어떻게 존중해야 하는지, 인간의 모습을 한 의체와 그렇지 않은 의체에 대해서는 어떨지에 대해 생각하다가 쓰게 되었다. 비인간형 의체가 하필이면 토끼 형태가 된 것은, 과학소설작가연대 2기 운영진의 프로필 사진 때문이었다. 2기 대표님인 듀나 작가님을 대신해 그 자리에 앉아 있던 토끼 인형을 본 순간, 이 이야기는 바로 만들어졌다.
<우주 멀미와 함께 살아가는 법>은 아쿠아리움에서 우주처럼 어두운 배경 아래 둥실둥실 떠다니는 달해파리들을 보다가 떠올린 이야기다. <교환 및 반품은 7일간 가능합니다>는 사람이 죽은 뒤의 사십구재가 어떻게 만들어졌을지를 생각하다가 만든 이야기다. 어쩌면 옛사람들은 아이가 태어나고도 대략 한두 달 때쯤은 온전히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것 같은 그 느낌에서, 사람이 죽고도 49일 동안은 온전히 저승에 다 도달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레디메이드 옵티미스트>는 심리상담센터나 정신과 의사 선생님들이 말하는 “헤르만 헤세도 정신과 약을 꼬박꼬박 잘 먹었다”는 이야기에서 출발했다. 이 이야기 중간에 언급되는 ‘심초하’ 작가는 요즘 내가 무척 좋아하는 세 작가님의 성함에서 한 글자씩 빌려와서 만든 이름이다. 심너울, 김초엽, 문목하 작가님. 제가 작가님들을 많이 좋아하고 질투합니다.
<옴팔로스>는 단행본에 실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환상문학웹진 거울>에서 한중 SF 교류를 할 때 참여하며 내 소설 중 제일 먼저 외국어로 번역된 소설이 되었다. 2020년에 신진호 연출가님이 김동식, 박민재 작가님의 단편들과 함께 <우주에 가고 싶어 했었으니까>라는 옴니버스 SF 연극으로 만들어주시기도 했다.
<바이센테니얼 비블리오필>은 계속 책을 읽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는 창립기념일 무렵마다 올해 몇 권이나 책을 샀고, 이 추세로 80세까지 책을 읽으면 앞으로 몇 권을 더 읽을 수 있는지 계산해준다. 어느 해인가, 그 통계에서 “현재의 독서 패턴을 유지하신다면 80세까지 만오천 권의 책을 더 읽으실 수 있어요”라는 글을 읽었다. 만오천 권은 결코 적은 양이 아니지만, ‘그것밖에 못 읽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글을 보고서야, 일찍 죽고 싶지 않다, 최대한 가늘고 길게 오래 살면서 책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 이야기는 《여성작가 SF 단편모음집》에 수록되었고, 이번에 몇 군데를 수정했다.
<불법 개조 가이노이드 성기 절단 사건>은 여성에 대한 폭력과 강력범죄가 본격적으로 가시화되던 2017년 무렵에 썼는데, 여성형 섹스 안드로이드나 안드로이드 사창가 같은 뻔하고 진부한 소재는 그만 쓰면 좋겠다는 이야기와 그에 대한 반박들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 소재로 다른 이야기를 써보고 싶어서 일부러 썼다.
<아틀란티스 소녀>는 서정주의 시 <꽃밭의 독백–사소단장>을 다시 읽다가 수첩에 그림을 끄적거린 끝에 쓰게 된 소설이다. 소설도 쓰지만 만화 연출 작업도 하다 보니, “문 열어라 꽃아”하며 우주의 문 앞에 선 소녀를 떠올린 것이 소설로 이어졌다. 사소의 후계자가 아리영, 즉 신라의 알영인 것은, 삼국유사의 선도성모 설화에서 유래했다.
<탯줄의 유예>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면서, 이 어린이가 어린이집 친구들과 뭘 하고 노는지 궁금해하다가 쓰게 되었다. <언인스톨>은 《토피아 단편선: 텅 빈 거품》에 수록되었고 몇 군데가 수정되었다. 오랜 친구이자 신화 팬인 윤과 대화하다가 “신화창조 140기를 모집하는 미래”를 떠올리며 만들었다. <죽은 사람의 관 위에 열여섯 사람>은 어느 날 누크맵(https://nuclearsecrecy.com/nukemap/)이라는 사이트에서 수도권 지도를 띄워놓고 원폭의 위력과 범위들을 검색해보다가 쓰게 되었다.
<파촉, 삼만리>는 2019년 중국의 SF 잡지 <과환세계>와 중국 청두 국제 SF 콘퍼런스에서 주관한 ‘100년 후의 청두’ 공모전에서 특별상을 받은 소설이다. 역사상 최초의 산업용 로봇을 만든 인물로 제갈량을 밀고 있었는데 이 소설에서 그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기뻤다. 청두에는 가본 적이 없어서, 청두만의 분위기를 살릴 수 있는 디테일한 무언가를 찾기 위해 고민을 많이 했는데, 《청두, 혼자에게 다정한 봄빛의 거리에서》를 쓰신 번역가 이소정 님께서 도움을 주셨다. 한편 이 소설은 외국에 공모전에 제출하기 위해 쓰려다 보니, 쓰는 과정에서 번역기가 이해하기 쉽게 문장을 다듬어서 다른 소설들과는 조금 글투가 다른 맛이 있다. 집에서 AI 스피커에 지시를 하거나 스마트폰 키보드로 글을 입력할 때 말투가 달라지는 것처럼, 구글 번역기 친화적인 글을 쓰고 있으려니, 인공지능이 인간의 자연어를 이해하는 만큼 미래의 인류도 점점 더 기계가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입력하는 방법을 찾아 나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떠내려가지 않는 것이 고작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글을 쓰고 있다. 곁에 있는 사람들과 이 책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
—2021년 늦가을, 전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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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9-11-90394-81-9 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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