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에서 우주복을 입은 채로는 눈물을 닦을 수가 없습니다. 닦으려면 헬멧을 벗어야 하니까요. 눈물은 차오르는 대로 고였다가 눈꺼풀이 깜빡이는 순간마다 조금씩 튕겨나와 반짝입니다. 많이 울고 나면 그 반짝이는 빛은 선명하게 보이지 않지요. 눈앞이 흐려진 뒤니까요. 눈물이 가득 차면 세상의 모든 빛들은 홀로 뜬 별 같은 선명한 광원이 아니라 성운이나 은하 같은 빛의 무리로 보입니다. 세상이 슬픈 이를 홀로 두지 않기 위해 그가 흘리는 눈물의 빛 덩어리 속에 모이기로 한 것 같죠.
우주에서 조난당한 뒤 자신의 목숨이 2시간밖에 남지 않았음을 받아들인 한 기술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지구의 많은 존재들을 향해 긴 독백을 남겼습니다. 아마 거기에는 닦을 수 없는 눈물과 거기에 어린 구름 같은 빛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겠지요.
있었겠지요, 라고 말한 이유는 순전히 제 추측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책을 읽다 말고 조난당한 이가 스스로 우주복에서 산소를 뺄 때까지 수십 분 동안 무슨 말을 했을지 생각해보았습니다. 《낙원의 샘》은 이 슬프고 아름다운 일화를 전해주면서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커녕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았거든요. ‘그 여성’이 의식이 남아 있는 동안 긴 이야기를 했다고 전해줄 뿐입니다.
이 일화는 소설의 주인공인 모건이 회상을 하는 장면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삭제된 정보들은 고든이라는 인물의 성격에 의해 결정된 것이겠죠. 정말로 모건은 그때 죽은 여자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녀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 금방 잊어버렸을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천재 공학도로서 지구에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연이어 세우겠다는 야심 말고는 소위 ‘인간적’인 욕망이나 감수성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네, 이런 사람이 주인공입니다. 《낙원의 샘》의 주요 플롯은 이런 사람이 정지위성 궤도와 지표면을 잇는 초대형 엘리베이터를 지으려고 고군분투한다는 내용입니다. 인물과 주요 플롯이 순도 높은 (문학성과 비슷한 의미로 쓸 수 있다면) ‘공학성’ 속에서 하나가 될 것 같죠.
실제로 《낙원의 샘》을 읽은 독자들의 감상은 대개 우주 엘리베이터에 집중돼 있습니다. 물론 우주 엘리베이터는 그만큼 멋진 아이디어죠. 지표면에서 정지위성 궤도까지 이어지는 탑은 대단히 유용한 동시에 그 존재 자체가 스펙터클합니다. 《낙원의 샘》은 이 멋진 발상을 비교적 친절하게 설명한 뒤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그 기념비적인 탈것 속에서 바라본 지구와 우주의 장엄한 모습을 보여주기까지 합니다. 이 소설에서 큰 감흥을 받지 못한 독자라도 모건이 탑의 궤도를 따라 오로라 속을 헤쳐나가는 순간의 묘사만큼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거예요. 결국 우주 엘리베이터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 갈망하는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목표이자 지구에서 가장 거대한 구조물로써, 얼핏 《낙원의 샘》이라는 소설의 내면과 외면 모두를 장악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낙원의 샘》의 책소개를 보고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독자들도 꽤 있을 겁니다. 소설이 공학적 아이디어에 너무 몰입한 것처럼 보이죠.
실제로 읽어 봐도 얼핏 그래 보입니다. 《낙원의 샘》을 비판하는 의견들은 대부분 이 소설에 보조 플롯들이 이상하리만큼 많고 또 그 보조 플롯들이 이상하리만큼 허무하게 종결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초기작에 비해 우주와 세계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진 아서 클라크가 굳이 이런저런 소재를 끌어들였다가 결국 소설 속에 녹이지 못하고 대충 처리해버리지 않았나 하는 거죠. 그래서 작가가 우주 엘리베이터 자체에만 집중했다면 더 단단하고 꽉 짜여진 소설이 나왔을거란 아쉬움에는 어느정도 타당성이 있습니다. 사실 저도 십수 년 전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같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아니 이럴 거면 그 얘긴 뭐하러 시작한 거야... 라고 몇 번이나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을 좋아하기는 쉽지 않죠. 어쩌면 세상 수많은 소설 작법서 중 한 권에는 《낙원의 샘》이 ‘절대 따라하지 마시오’의 사례로 소개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세월이 흘러서 그럴까요. 16년은 한 사람의 인생에는 그럭저럭 많은 영향을 끼치기에 충분한 시간이니까요. 이번에 다시 읽은 《낙원의 샘》은 전과는 다른 인상을 남겼습니다. 과장된 표현으로 보일까 봐 좀 걱정은 됩니다만, 솔직히 말하면 저는 예전과 달리 《낙원의 샘》을 아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소설의 마지막 대사를 읽고 다시 도입부로 돌아갔습니다. 가벼운 반전을 통해 2천 년에 육박하는 시간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는 멋진 도입부죠(어떤 소설 작법서에서는 도입부의 모범 사례로 소개했을지도 모릅니다). 《낙원의 샘》의 시작과 끝은 모두 긴 세월을 흘려보내면서 작동합니다. 또한 중간중간에도 몇 번씩 수 년의 시간을 뛰어넘죠. 주요 등장인물들은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면 마치 약속한 듯이 한 번씩은 과거를 돌아봅니다. 몇 년 전, 십 몇 년 전, 또는 아주 젊었던 시절...
특별한 설정은 아니지요. 나이가 들수록 지나온 삶은 길어지고, 회상은 그 빛깔이 퇴색하는 대신에 점점 다양한 구색을 갖추게 마련이니까요. 다만 《낙원의 샘》에 등장하는 잦은 회상은 (거의) 영원불멸하는 건축물 및 그 부속물들과 자주 대비됩니다. 늙은 라자싱헤가 벽화 속에 그려진 여인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장면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미 이천 년 동안 자리를 지킨 벽화 앞에서 라자싱헤는 삶이 끝남과 동시에 자신의 존재가 지워지기 시작할 거라는 사실을 느긋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다른 주요 등장인물들은 라자싱헤와 다릅니다(안분자족하는 캐릭터인 킹슬리는 예외입니다만 그는 자신만의 플롯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 역시 삶의 유한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지만, 그 유한성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넘어서고자 합니다. '한 인간'보다 더 크고 오래 가는 무언가를 만들거나 지킴으로써 말이죠. 우주 엘리베이터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낙원의 샘》에서 외계에서 온 우주선인 스타글라이더 이야기를 제외한 보조 플롯은 유한한 인생을 넘어서는 가치를 부여하기 위한 서로 다른 시도를 그리고 있습니다. 종교, 건축 공학, 현세에서 절대자가 되어 유한한 삶의 한계를 끝없이 확장시키기....
이제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을 말씀드릴 차례군요. 아서 클라크는 인생의 가치를 확장하려는 이 모든 시도를 부셔버립니다. 굳이 부순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이 보조 플롯들이 좌절하는 과정이 평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이 소설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좌절은 갈등이 해소되는 과정에서 승패가 나뉘고 패자가 실패의 무게를 떠안는 식으로 진행되지 않습니다. 허망하거나 황망합니다. 수천 년을 이어 온 사찰은 갈등을 빚어 온 상대가 아니라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인해 갑자기 몰락의 위기에 처하고, 환속하는 장면에 따로 분량을 할애받을 정도로 중요한 인물로 보였던 승려는 수십 년이 지나 다른 이의 회상 속에서 아무런 중요성도 없는 인물로 두루뭉술하게 언급될 뿐입니다. 단 한 명만이 드라마틱한 종말을 맞습니다. 즉, 《낙원의 샘》은 삶의 유한성을 넘어서려는 다양한 시도만큼이나 다양한 실패를 보여줍니다. 사고, 자신의 예언에 스스로의 삶을 속박당하기,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게 다른 이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기...
몇몇 독자들이 지적했듯이,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좌절이 적절한 소설적(?) 절차에 의해 스토리에 잘 녹여졌더라면 《낙원의 샘》은 좀더 자연스러운 소설이 되었겠지요. 보통의 잘 짜여진 스토리 속에서 좌절하는 인물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 속에서 비극이라는 운명을-의미를- '획득'합니다. 역설적이게도, 때로는 패배에서 기인한 비극성이 삶의 유한함을 벗어날 수 있는 날개가 되어주기도 하죠. 이것이 비극의 힘이며 의미이고, 드라마가 삶에 의미를 덧씌우는 방식입니다. 좋은 비극에서는 가능한 많은 인물들이 자신의 운명을, 집을, 가야 할 길을 갖고 있습니다. 거기서는 슬픔과 절망은 각자의 존재 이유를 갖습니다. 비극 위의 천사는 패자들도 굽어봅니다. 비극 속의 패자들은 슬픔과 고통을 신의 뜻으로 이해한 성경 속 욥의 후예들입니다.
그러나 《낙원의 샘》은 그 너머로 나아가려고 했습니다. 아서 클라크는 더 다양하고 보다 순도 높은 실패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그는 우주 엘리베이터라는 주요 플롯과 주인공을 기존의 드라마 구조 속에 세운 반면, 보조 플롯들을 드라마 바깥의 허망하고도 무자비한 전개 속에 노출시킴으로써 드라마의 안과 밖을 모두 다루려 했습니다. 소망의 진정한 실패는 비극의 의미조차 획득하지 못한 채 시들어버리는 데 있으므로, 드라마만으로는 그 덧없음을 모두 전달할 수가 없죠. 의미심장하게 등장했다가 어리둥절하는 사이에 사라진 보조 플롯들이 안겨준 당혹스러움만이 그 덧없음에 부합합니다. 인간다움이라는 환상을 벗겨낸 우주의 냉정한 풍경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탑 짓는 소설에 뜬금없이 외계의 우주선 스타글라이더가 등장한 것도 그다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스타글라이더는 그 냉정한 우주에서 온 목소리니까요.
아서 클라크는 주요 인간 등장인물들에게 특별한 개성을 부여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인류라는 보편적인 개념에 부합할 만한 몰개성한 캐릭터들을 더 선호했지요. 그리고 이들로 표상되는 인류를 미지의 우주와 대비시키곤 했습니다. 말하자면 아서 클라크의 소설은 우주 시대를 배경으로 한 인류학적 사고 실험에 가깝습니다. 《낙원의 샘》에서도 인류는 유한한 삶의 바깥을 꿈꾸고 그곳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장시키고자 하지만 누구도 성공하지 못합니다. 모든 인물이 동일한 인류로 동일한 한계를 지니고 있죠. 그러니 여기서 설정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인(간)이 등장하면 곤란합니다. 그래서 스타글라이더가 날아온 거죠.
외계인의 사고방식을 담은 스타글라이더의 AI는 지구인들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데이터를 분석한 뒤에 특히 신과 종교에 대해 의아한 반응을 보입니다. ‘신에 대한 믿음은 포유류의 번식 과정에서 생긴 심리적인 인공물이 분명하다’고도 하지요. 절대적인 존재를 향한 동경이나 영원을 향한 갈망은 스타글라이더의 메시지를 통해 부정됩니다(또는 의혹이 제기됩니다). 스타글라이더는 《낙원의 샘》의 대변인이자 안내자인 셈입니다. 특히 에필로그에서 스타글라이더를 만든 외계인이 내뱉은 마지막 대사는 단편 <동방의 별>을 연상케 할 정도로 인상적이죠. 에필로그 직전에 장엄하게 끝맺은 이 소설의 유일한 드라마, 드디어 성공한 것처럼 보였던 '한 인간'의 숭고한 에피소드는 그 한 문장에 끌려들어 녹아 버립니다. 아서 클라크는 마지막까지 냉정하게 이 소설의 주제를 재확인시켜주었죠. 그 주제에 대해서는 러시아의 저널리스트이자 회의주의자였던 알렉산드르 헤르첸이 쓴 아래의 문구로 대신하겠습니다.
역사는 불합리한 것들을 통해 발전해 왔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환상과 환영을 열망하면서, 매우 실질적인 결과들을 달성해 왔다. 그들은 백일몽 속에서 천상의 낙원을 찾기도 하고 지상의 천국을 찾기도 하면서 무지개를 따라갔다. 가는 동안 영원히 끝나지 않을 노래를 부르고, 영원히 서 있을 조각상으로 사원들을 장식하고, 로마, 아테네, 파리, 런던을 지었다. 하나의 꿈이 끝나면 또 다른 꿈이 들어선다. 가끔은 잠이 더 가벼워지기도 하지만 절대 없어지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무엇이라도 받아들이고, 무엇이라도 믿고, 무엇에라도 복종할 것이며, 많은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두 개의 종교 사이에 벌어진 틈으로 눈부 신 빛이 들어오고 차가운 이성의 바람이 불 때, 그들은 공포에 떨며 움츠러든다...
- 존 그레이의 《동물들의 침묵》, 김승진 옮김 (이후, 2014)
이런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표출한 아서 클라크의 대표작은 역시 《유년기의 끝》이겠지요. 《유년기의 끝》은 전체적으로 통일된 플롯을 갖추고 있어서 보통 이쪽을 더 완성도 있는 작품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저는 통일되지 않고 툭 떨궈지는 플롯들을 지닌 《낙원의 샘》에 더 마음이 갑니다. 이쪽이 인간사와 더 닮아있다고 느낍니다. 갑작스러운, 공백을 야기하는, 더 깊이 실패하는, 말하자면 거의 시적인 방식으로 사라져버리는 이야기들 말이지요. 그리고 어디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질문의 형태로 끝나는 결말도요.
뉴웨이브와 포스트 뉴웨이브 SF들이 온갖 기묘한 실험을 통해 인생의 수수께끼같은 면모를 드러내려고 애쓰고 있을 때, 이 클래식한 거장은 고전적인 서사 구조 속에서 그저 에피소드들을 켜고 끄는 스위치를 재배열하는 것만으로 삶의 아스라함을 재현해 냈습니다. 그리고 전혀 슬퍼하지 않으면서, 누구도 동정하지 않으면서 인간의 삶에 담긴 근본적인 결핍과 슬픔을 드러냈지요. 《낙원의 샘》은 아서 클라크의 소설 중에 가장 이상한 방식으로 빛나는, 아름답고 슬픈 소설입니다.
언젠가 슬픈 날에, 자기도 모르게 옛일들을 뒤돌아보게 되는 날에 이 책을 한번 펼쳐보시는 건 어떨까요. 이 소설 속의 인류는 수명이 좀 더 긴 레플리컨트와도 같은 존재니까요. 그 모든 꿈과 절망들도, 그 마음들을 담은 기억과 함께 곧 모두 사라질 거예요. 빗속의 눈물처럼요.
아, 마침 눈이 오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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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헤르첸을 인용한 부분은 이후출판사에서 출간한 존 그레이의 《동물들의 침묵》에서 재인용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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