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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주 작가/번역가의 '크로스토크' 리뷰 -시사IN

아작 미디어

by arzak 2017. 12. 22.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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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밖에 내지 않은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시사IN 2017. 2. 10 / 제489호


박현주 (번역가/작가/에세이스트)






이른바 민족 대명절, 이때 책을 읽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고독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누구일까? 명절 준비와 정리라는 큰일을 끝낸 후에도 왁자지껄하게 윷놀이라도 하며 가족으로서 의무를 다해야 하는 시간에, 혹은 친구나 연인과 함께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러 갈 수도 있는 시간에, 아니면 조용히 혼자 보내더라도 그간 모자란 잠을 잘 수도 있는 시간에, 책을 꺼내들다니? 그것도 지금과 여기를 떠나는 장르인 SF를 탐독할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이 가상의 독자를 머릿속으로 그려보자면, 그는 관심이라는 명목으로 성가시고 무례한 질문까지도 주저하지 않는 친척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일 수도 있다. 가족과 연인, 친구와 함께 오붓한 시간을 즐겁게 보내는 데도 에너지를 많이 투자해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사람일 수도 있다. 무언가 재미있는 이야기가 없을까, 휴대전화를 들고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열심히 훑었다가 허무하게 창을 닫은 사람일 수도 있다. 늘 누군가와 같이 있는데도, 쓸쓸함이라는 기분이 떨쳐지지 않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추천할 만한 SF로는 <크로스토크>(코니 윌리스 지음, 최세진 옮김, 아작 펴냄, 2016)만 한 작품이 없다. 심지어 두 권 900쪽에 육박하는 분량으로, 자신만의 시간을 충분히 향유할 수 있다.


(...)



모바일 통신기기 회사 컴스팬에 근무하는 브리디 플래니건은 출근 직후부터 대화의 폭격에 시달린다. 쏟아지는 문자 메시지, 가십을 전달하러 끊임없이 들르는 동료들, 가족들의 전화. 그 대화의 주요 화제는 컴스팬의 간부이자 남자친구인 트렌트가 제안한 EED 수술이다. 정서적 유대감이 있는 두 사람이 같이 EED 시술을 받으면 서로의 감정을 감지할 수 있다는 첨단 의학 기술이다.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연인인 트렌트와 EED로 연결된 사이가 될 수 있다니, 브리디에게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다. 심지어 할리우드 유명 커플 브래드 피트와 앤절리나 졸리까지도 받았다지 않는가!(물론, 현재 그들의 관계를 보면 EED의 의학적 효과에는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브리디의 EED에 반대하는 이들도 있다. 가족 중 핵심 권력자인 우나 고모는 “아일랜드의 딸” 모임에 참여하면서, 거기서 만난 아일랜드계 청년 숀 오라일리를 브리디에게 소개해주고 싶어 한다. 아홉 살 난 딸 메이브가 여성 독립성을 해치는 폭력적인 디즈니 영화를 보거나 인터넷을 통해 테러리스트들과 접촉할까 봐 안달복달하는 메리 언니는 브리디에게는 관심이 없고 딸에 대한 걱정만 쏟아놓는다. 동생 캐슬린은 바람직하지 못한 남자들만 만나는 연애 문제를 언니에게 상담하려 한다. 회사에서는 지하 2층에 틀어박혀 기묘한 장치만 만지작거리는 비사교적인 엔지니어 C. B. 슈워츠가 EED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한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브리디를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결국 브리디는 트렌트와 함께 베릭 박사의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만다. ‘크로스토크(Crosstalk·혼선)’라는 제목에서 익히 짐작할 수 있듯이, 그리고 모든 로맨틱 코미디가 그러하듯이, 상황은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수술 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리던 브리디는 드디어 누군가의 목소리를 머릿속으로 듣는다. 하지만 그 사람은 트렌트가 아니고,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사람이다. 이제 브리디는 트렌트와의 연결을 다시 이어야 하고, 다른 사람과 연결되었다는 사실을 숨겨야 하며, 가족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갑자기 잔다르크처럼 허공의 목소리를 듣는 자신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독자들은 흘러넘치는 대화 속에서 중심을 찾아야 한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정보는 모두 대화로 전해지며,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말을 한다. 즉, 우리가 노출되어 있는 과잉 커뮤니케이션은 소설의 형식으로도 체감할 수 있다. 타인과 소통하고 싶은 갈망의 이면은 그 외의 노이즈와는 단절되어야 하는 필요이며, 단선과 연결을 적절히 반복해야만 인간은 살아나갈 수 있다. 누구와도 편하고 쉽게 이어지는 서비스는 동시에 그를 선별할 수 있는 기능이 수반될 때만 의미가 있다. <크로스토크>의 어떤 부분은 일본 만화 <사토라레>(국내 제목 <돌연변이>, 사토 마코토 글·그림, 세주문화사 펴냄)를 떠올리게 한다. <사토라레>에서는 정신적 에너지가 너무 강한 천재들이 있고, 그의 속마음이 주위 사람들 모두에게 들린다. 그리하여 “일반인”들은 천재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이 속으로 하는 생각을 모른 척해주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여기서 깨달을 수 있는 점이 있다. 우리는 가끔 타인이 나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섭섭해하지만, 인간이 굳이 입 밖에 내어 말하지 않는 얘기들을 듣는 건 즐겁지만은 않은 일이다. 사토라레와는 반대로, 알고 싶지 않은 타인들의 어두운 생각을 듣게 된 브리디는 역시 불쾌한 진실에 부딪히고, 그에 함몰되지 않도록 의식 속에 방어벽과 성역을 만들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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