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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사소한 칼'

아작 미디어

by arzak 2018. 3. 15.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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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2018. 1. 10






우주제국에서 볼리우드 뮤지컬 감상? 이런 시대착오가!




(..)


라드츠 제국을 무대로 하는 두 번째 소설 <사소한 칼>은 우주를 배경으로 한 서스펜스 넘치는 액션물이었던 전편 <사소한 정의>와는 전혀 다른 책이다. 이야기는 여전히 이어진다. 한 때 거대 함선의 인공지능이었지만 지금은 그냥 하나의 몸을 가진 사람이 된 주인공 브렉은 이제 함장이 되었다. 절대군주 아난더 미아나이의 정신이 분열되자 라드츠 제국은 내전에 휩싸였다. 하지만 브렉이 오온 대위의 여동생이 있는 행성 아소엑의 우주정거장에 파견되면서 우주전쟁의 이야기는 일단 정지한다. 협주곡의 느린 2악장 같달까. 액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본격적인 전쟁 이야기를 계속 보려면 3편인 <사소한 자비>를 읽어야 한다.


대신 소설은 라드츠 제국의 문화를 조금 더 깊이 파헤친다. 1편을 읽은 독자들은 이미 이 제국의 독특한 문화에 대해 알고 있다. 함선과 우주정거장을 지배하는 거대한 인공지능, 개별 사람들의 성별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고방식. <사소한 정의>가 큰 설정을 굵게 그려 액션의 배경으로 삼았다면 <사소한 칼>은 이 문화의 세부를 꼼꼼하게 판다.


가장 먼저 눈에 뜨이는 건 이 소설의 오묘한 시대착오이다. 우주제국에 살면서 차와 찻잔에 집착하고 가문을 중시하고 여전히 점을 치며 영화 취향은 볼리우드 뮤지컬. 좀 어이가 없긴 한데, 레키는 이런 세계를 마치 제인 오스틴이 자기가 살았던 레전시 시대의 중상층 영국인 사회를 묘사하듯 시치미 뚝 떼고 그럴싸하게 그려낸다. 큰 그림은 여전히 어이가 없지만 디테일이 워낙 좋다보니 ‘그런가보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굳이 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지만 그래도 구경하기 재미있는 곳이다.


풍속 묘사를 넘어서면 우린 제국을 이루는 매커니즘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된다. 라드츠 제국은 자신이 우주를 문명화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폭력적인 병합 과정을 겪은 사람들에게 이 말이 먹힐 리가 없고 여기엔 수많은 불공평함과 불의가 존재한다. 아소엑 행성은 그런 제국의 문제점이 어떻게 쌓여가는지 보여주는 견본인 셈이다. 이 문제점 중엔 권위와 권력에 기댄 성범죄도 포함되는데, 성별에 신경 쓰지 않는 라드츠 제국 문화의 특성 때문에 우린 이를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된다.


하지만 <사소한 칼>은 <사소한 정의>가 그랬던 것처럼 브렉의 이야기이다. 아직도 인간과 기계 사이의 모호한 지점에 위치하며 자신의 죽은 상사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존재. 이런 그녀의 독특한 위치가 3부작의 마지막 편인 <사소한 자비>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될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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