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라 작가의 인사말은 “투쟁”이다. 행사장에서 오랜만에 만났을 때도, 채팅창에서 작별인사를 할 때도 투쟁으로 시작해 투쟁으로 끝맺는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싸움은 집회 현장과 지면 그리고 삶 속에서 항상 현재진행형이었다. 적어도 내가 지켜본 바로는 그러하다.
그런 그의 새로운 단편집이 나왔다. 제목은 《그녀를 만나다》이다. 이번 책에서도 그 특유의, 투쟁의 에너지는 여전히 넘쳐흐른다. 다만 그 싸움의 방식이 예전보다 더 정제되고 노련해졌을 뿐. 눈앞에 보이는 것을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는 식이 아니라, 투쟁에 앞서 동지를 찾고 결의를 맺으며 전선을 구축한 뒤 집요하게 승리를 추구하는 식이라고나 할까? 비록 그 싸움이 매번 승리로 끝나지는 않을지라도, 싸움에 임하는 전략은 크게 바뀐 셈이다.
새삼스럽지만 나는 그의 예전 단편집, 《저주토끼》를 좋아한다. 그 책의 저자후기에서, 정보라 작가는 자신의 단편집에 대해 “출판사에서는 불의가 만연한 지금 같은 시대에 부당한 일을 당한 약한 사람(들)을 위해 복수하는 이야기가 마음에 들어서 이 단편집을 내기로 했다”지만, 작가 자신은 “쓸쓸하고 외로운 방식을 통해서, 낯설고 사나운 세상에서 혼자 제각각 고군분투하는 쓸쓸하고 외로운 독자에게 위안이 되고 싶었다”고 밝혔다.
정리하자면, 《저주토끼》에는 세상의 불의에 분노한 나머지 결연하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홀로라도 의로운 일을 행하고자 하는 협객의 풍모가 담겼다고 할 수 있겠다. 울분을 참지 못한 나머지 자신이 어떤 결말을 맞이하든 일절 상관하지 않고 일단 처 들어가서 다 때려 부수고 보는 그런 패기라고나 할까. 쓸쓸하고 외로운 방식이지만, 제각각 고군분투하는 누군가에게는 그보다 더 큰 위로도 없을 것이다. 나는 항상 그 위로가 고마웠다.
반면 이 책, 《그녀를 만나다》에서 정보라 작가는 《저주토끼》를 썼을 때와는 달리 연대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 연대는 무기력한 관성으로 유지되거나 볼썽사나운 실패로 마무리되기도 하며 가슴 아픈 이별로 끝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연대는 연대다. 서로 동떨어진 누군가가 상대방의 존재를 감지하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얻는 것을 넘어, 직간접적으로 얽히고설키며 함께 전진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수록작 중 이런 경향성이 크게 나타나는 작품으로는 <영생불사연구소>와 <아주 보통의 결혼> 그리고 <씨앗>을 꼽을 수 있겠다.
<영생불사연구소>는 불로장생과 영생불사의 차이에 대해 갑론을박을 펼치는 연구소에서 펼쳐지는 일상담이다. 허례허식으로 가득 찼지만 (아주 약간이지만) 좋은 의미로든, (대부분의 경우처럼) 나쁜 의미로든 가족과도 같은 단체이지만, 그 안의 관계에서 누군가는 위안을 찾고 누군가는 슬픔을 느낀다.
<아주 보통의 결혼>은 아내가 자신 몰래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남편이 진상을 쫓으며 시작되는 스릴러다. 그 추적의 과정 끝에 주인공이 발견하게 되는 진실은 너무나도 가혹한 것이나, 이는 또 담담하게 살아남은 사람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만들어내는 이야기로 연결되기도 한다.
<씨앗>은 다국적 생명공학기업 모셴닉의 정장 인형들이 나무와 공생하는 인간들과 이권 문제로 충돌하며 시작되는 이야기다. 동화 같기도 하고, 선언문 같기도 한 이 작품은 일시적인 패배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져나갈 투쟁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외에도 이 단편집에 수록된 다른 많은 작품들은 크고 작으나마 연대의 이야기를, 관계의 이야기를 그려나가고 있다. 《저주토끼》가 의로운 지사의 불꽃처럼 살다가 끝나버린 짧은 일생과도 같은 이미지였다면 《그녀를 만나다》는 숱한 패배와 후퇴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승리를 향해 이를 갈고 있는, 단련되고 영민한 활동가의 술회와 같은 이미지로 전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처연함은 의연함이 되었고 위안은 결의로 바뀌었다. 《저주토끼》가 미로에 갇힌 한 개인의 저돌적인 포효였다면, 《그녀를 만나다》는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나지막이 읊조리는 투쟁가다.
그렇다고 정보라 작가의 변화가 전형적인 프로파간다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투쟁 현장에서 극적인 장면만 편집해서 승리와 패배의 서사시를 그려내는 방식은 정보라 작가의 작업과는 궤가 다르다. 그보다는 싸움이 일상화된 활동가들의 하루하루를 때로는 담담히, 때로는 격렬하게 담아내고 있을 뿐이다. 앞서 정리한 내용을 반복해 말하자면, 이 과정에는 지루함도, 쓰라린 패배도, 내일을 기약하는 투지도 다 담겨있다. 투쟁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마지막으로 당부하건대, 위의 서술로 인해 정보라 작가 특유의 그 에너지가 위축되었다고 여기지는 말아주시길 부탁드린다. 투쟁의 방법론이 바뀌었을 뿐, 정보라 작가는 한결같이 위를 바라본 채 아래를 포용하며 앞을 향해 전진하는 추진력을 간직하고 있다. 아니, 그 힘은 오히려 예전보다 더 강력하고 더 능수능란해진 것이 아닌가 놀랄 정도다. 《그녀를 만나다》는 아주 새로운 정보라를 보여주면서 그 안에 언제나 항상 그래왔던 정보라를 담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이 책이 신기하면서도 고맙고 또 반가울 따름이다.
— 홍지운,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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