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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감시원’ 맛보기 - 3) 클리어리 가족이 보낸 편지

아작 책방/03 화재 감시원

by arzak 2016. 1. 7.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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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어리 가족이 보낸 편지>는 22페이지 분량으로 <화재감시원>에 수록된 다섯 편 소설 중에 가장 짧은 소설입니다. 잔잔하고도 수려한 묘사 속에서 반전이 있는 그런 작품인데요. 훌륭한 작품이지만 수다가 살아 있는 다른 작품들처럼 경쾌한 느낌을 주지 못할까봐 이번 번역서에선 세 번째에 나오는 작품으로 편집되었습니다. 소설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우체국에 클리어리 가족이 보낸 편지가 있었다. 나는 탤벗 아줌마가 부탁한 잡지와 함께 편지를 배낭에 넣고 밖으로 나와 스티치를 묶어두었던 줄을 풀었다.”(p129)

소녀 린과 그의 가족은 파이크스피크 산 아래에서 살고 있습니다. 소설에선 자연스런 일상이 묘사되는 것 같은데, 읽다 보면 그 일상은 어딘가 부자연스럽습니다.

“작년엔 6월 중순까지 눈이 왔는데, 지금은 겨우 3월이다. 스티치가 보고 있는 개똥지빠귀도 남쪽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그 작은 꼬리가 꽁꽁 얼어버릴 것이다. 아빠는 작년이 이상했다며 올해엔 날씨가 정상으로 돌아올 거라고 말하지만 아빠조차 자기 말을 믿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온실을 지을 턱이 없다.”(p131)




하지만 독자들은 그 부자연스러움의 이유를 읽지 못한 채 계속해서 린의 시선을 따라가게 되죠.

“파이크스피크 산은 완전히 눈에 덮여 있었다. 유료 도로도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우리는 클리어리네 가족이랑 저 산으로 등산을 가기로 되어 있었다.“(p134-135)

"클리어리네는 우리가 일리노이에 살 때 제일 친하게 지냈던 가족이에요. 재작년 여름에 우리를 보러 오기로 돼 있었고요. 같이 파이크스피크 산에 등산도 하고 그럴 예정이었잖아요.“(p139)

린은 재작년 여름에 찾아오기로 했던 클리어리 가족의 편지를 이제야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그다지 놀랍지 않은 비밀은 가족들의 대화 속에서 곧 밝혀집니다. 그리고 편지를 찾았다는 말로부터 시작한 소설은 같은 상황을 서술하면서 끝이 나게 되죠. 

“나는 우편 더미마다 백 번쯤은 더 뒤진 끝에 클리어리 가족이 보낸 편지를 찾았다. 탤벗 아줌마 말이 맞았다. 편지는 다른 집 우편함에 들어 있었다.”(p150)

<클리어리 가족이 보낸 편지>는 코니 윌리스의 초기작에 해당합니다. 역자는 후기에 “작가의 장편들로 코니 윌리스를 이미 안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다면, 이 초기 작품을 읽고 아마 그 평가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p371)라고 적었네요. 그래서인지 코니 윌리스는 이 작품의 후기에서 작품에서도 중요한 공간으로 나오는 우체국에 대한 기억을 반추하면서, 자신의 무명시절의 기억을 떠올립니다. 

“내 손글씨가 적힌 서류봉투 더미가, 그때 내가 여기저기 보냈던 여덟 편의 소설 전부가, 모조리 거절당한 채 쌓여 있었다. 

(...) 그 길로부터 나를 구해준 것은 이미 만들어놓은, 우표를 붙이고 주소를 적어놓은 반송용 봉투들이었다. 내 말은, 우표는 비싸니까, 마지막으로 한꺼번에 싹 다 보내본다 해서 더 상처받을 일은 없지 않겠어?“(p152-153)

거절당한 원고를 받았던 우체국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며 코니 윌리스는 젊은 작가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려고 하는데요. <클리어리 가족이 보낸 편지>가 그런 역할을 하기에 적절한 작품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작품은 읽으면 읽을수록 여운이 많이 남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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