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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감시원’ 맛보기 - 5) 내부 소행

아작 책방/03 화재 감시원

by arzak 2016. 1. 28.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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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맛보기’ 시리즈를 <여왕마저도>가 출간될 때까지 완료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화재감시원> 수록작 못지 않게, 혹은 능가할 정도로 흥미로운 <여왕마저도>의 수록작들도 어서 소개해드려야 할텐데 마음이 급하네요. 블로그지기의 게으름에 대해 양해를 구합니다.  


오늘 소개드리는 <내부 소행>은 <화재감시원>을 구입하신 독자분들이 이미 SNS상에서 “특히 재미있었다”라고 극찬하시는 작품입니다. 코니 윌리스가 2005년에 쓴 이 작품은 2006년 휴고상 수상작이구요. 국내에는 장르소설 전문잡지 판타스틱에서 2007년에 <디벙커는 귀신을 믿지 않아>라는 귀여운 제목으로 이미 번역 소개된 바가 있습니다. 원제가 <Inside job>이니 <내부 소행> 쪽이 더 원제에 가깝기는 합니다. 그런데 내용의 개략을 들어보시면 판타스틱이 택한 제목도 센스가 넘친다는 생각을 하시게 될 거예요.


이 이야기는 주인공인 롭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굉장히 생경한 직업인 ‘디벙커’인데, 일찍 은퇴한 헐리우드 여배우를 직원으로 고용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설정에서부터 시작하죠. ‘디벙커’(Debunker)를 검색해보면 “틀렸거나 비과학적이거나 기괴하거나 비정상적(abnormal)이라 생각되는 주장들을 반증하고 추적하고자 하는 과학적 회의주의자이다”(위키피디아)라고 적혀있는데요. 간단하고 투박하게 요약하자면 심령술사나 초능력자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사기/조작/속임수를 합리적으로 밝혀내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사례로는 스스로 대중들에 대한 눈속임의 기술을 가진 마술사 출신들이 자칭 초능력자들의 쇼의 트릭을 고발하는 것 등이 있죠. 자기 앞에서 사기임이 밝혀지지 않는 초능력을 발휘할 경우 100만 달러를 증정하겠다는 ‘100만 달러 초능력 챌린지’($1million Paranormal Challenge)를 주최한 제임스 랜디 같은 사람 말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 등장하는 롭은 마술사 출신도 아니고 그렇게 대중적이지도 않고 부유하지도 않은 <편협한 시선>이란 과학적 회의주의 잡지의 편집장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롭은 킬디를 고용하고 있죠. 여기서 킬디가 어떤 사람인지 소설의 서술을 살짝 살펴볼까요?



그녀의 아버지는 드림웍스의 이사였고, 현재 양어머니는 영화제작사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친어머니는 아카데미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다. 그리고 킬디 자신도 부자였다. 그녀가 영화계를 떠나 미신을 폭로하는 업계에 몸담기 전까지 영화 네 편만을 찍었을 뿐이지만, 그중 한 편이 그해의 최고 흥행작이었고 흥행 수입에 따라 출연료를 받는 계약을 했었다. 


내가 줄 수 있는 월급은 그녀가 발톱 매니큐어 칠할 수준도 안 됐지만, 외관상으로는 어쨌든 내 직원이었다.(p242-243)






과학적 회의주의자에게는 세 개의 기본원칙이 있었다. 첫째는 ‘특별한 주장에게는 특별한 증거가 필요하다’, 둘째는 ‘너무 훌륭해서 진짜라고 믿기 힘들 정도라면, 진짜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너무 훌륭해서 진짜라고 믿기 힘든 게 있다면, 그게 바로 킬디였다. 킬디는 부자일 뿐만 아니라 영화배우의 미모를 가지고 있었으며 똑똑했고, 무엇보다 할리우드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완벽한 회의주의자였다. (...)


킬디는 네 번째 양어머니와 살고 있었는데, 양어머니는 킬디를 <반지의 제왕>과 맞먹는 최고의 흥행작에 출연시켜 일찌감치 킬디가 은퇴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


그래서 나는 킬디가 디벙커 일에, 그리고 내게 지루해지는 것은 시간문제이고, 곧 시사회에 가거나 재규어를 몰고 다니는 삶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했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벤 애플랙이랑 같이 일해본 적 없죠?” 내가 그녀에게 영화계에서 벌써 은퇴해버리기에는 너무 아름답다고 했을 때 그녀가 한 말이다. “돈을 퍼준다고 해도 돌아가기 싫어요.”(p248-251)



자, 일단 길지 않은 중편소설에서 주인공 듀오만으로도 상당히 흥미로운 인물구성이 된 셈입니다. 그런데 이건 아직 ‘설정’일 뿐 ‘이야기의 시작’이 아니에요. 이야기의 시작에서부터 제3의 인물, 혹은 제3의 인물과 제4의 인물이 함께 드러납니다. 킬디는 롭에게 한 영매를 보러 가자고 제안하거든요. 롭은 매우 의아해하죠. 그의 생각에 영매란 사람들은 대체로 특별할 게 없기 때문이에요. 그럼 도대체 이 이야기는 어느 지점에서부터 시작하는 걸까요?


<내부 소행>은 “미국인들의 지적능력을 과소평가하여 망한 사람은 없었다. ㅡH.L. 멩켄”(p241)이란 인용구에서부터 출발하는 소설입니다. 특히 장르소설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독자들은 이 인용구가 실존인물의 실재했던 말인지, 아니면 이 자체로 가상인물의 발화인지 헷갈리겠죠? 미국 독자들은 헷갈리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헨리 루이스 멩켄(1880~1956)은 미국 문화 전반에 대해 준엄하게 비평하는 문예 비평가이며 회의주의자였다고 하니 말이에요. 멩켄의 경구는 여전히 영매들이나 믿는 ‘멍청한 미국인’(멩켄은 이런 의미를 가진 ‘부버스 아메라카누스’라는 라틴어식 조어를 만든 사람으로 유명합니다!)을 질타하기 위해 소설에 삽입된 것일까요?


소설을 조금만 읽어봐도 그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킬디는 이수스 신을 접신한다고 주장하는 아리아우라라는 이름을 지닌 영매가 이수스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목소리를 종종 낸다는 것을 알고 롭을 부른거죠. 롭은 아리아우라가 연기(?)하는 새로운 인물이 누구인지 오래지 않아 알아냅니다.



“누군지 알아.” 내가 말했다.


킬디가 키보드 두드리던 손을 멈췄다. “누구예요?”


“무례함의 대사제.”


“누구라고요?”


“볼티모어의 성스러온 공포, 상식의 사도, 그리고 사기꾼과 창조론자와 신앙 치료사와 무지한 자들의 골칫거리.” 내가 말했다. “헨리 루이스 멩켄이지.”(p280-281)

 


등장인물 네 명을 소개하고 나니 이렇게 길어졌네요! 120여 페이지에 달하는 소설은 이 네명의 설정에서 이끌린 갈등구도만으로도 복잡하게 전개됩니다. 과학적 회의주의자이며 디벙커인 주인공, 진짜라기엔 너무나 훌륭한 조수 힐디, 그리고 신통찮은 영매인 것 같은 아리아우라. 그 아리아우라가 하는 것치고는 너무나 훌륭하게 연기(?)되는 접신(?)된 헨리 루이스 멩켄!


과학적 회의주의자는 반증만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즉, 롭과 힐디는 단지 아리아우라가 연기하는 멩켄이 ‘가짜’라는 것만을 증명할 수 있어요. ‘진짜’라는 것은 증명되지 않죠. ‘진짜’라는 건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가짜’라는 게 증명되지 않을 때 찾아오는 믿음 같은 겁니다. 하지만 입증이 안 되더라도 롭은 과학적 회의주의자로서의 삶을 쉽게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디벙커는 귀신을 믿지 않아>라는 판타스틱의 의역 제목이 이해가 가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롭과 힐디 사이엔 아무런 갈등이 없을까요? ‘진짜’일 리가 없는 것이 ‘가짜’임이 입증되지 않을 때, ‘너무 훌륭해서 진짜라고 믿기 힘든’ 힐디도 의심받는 것이 상식 아닐까요? 회의주의자의 영혼이 영매에게 강림한다는 게 밝혀진다면, 그건 영매에게 좋은 상황일까요, 아니면 회의주의자에게 좋은 상황일까요? 아이러니로 가득찬 세상사를 들여다보는 유쾌한 소설, <내부 소행>이었습니다.


코니 윌리스는 후기에 이렇게 적었죠. 



나는 H.L. 멩켄이 정말 그립다. (...) 내가 그를 그리워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언어를 사랑했다는 점이다. 그의 저서인 <미국어>는 걸작이다. 마크 트웨인이 처음으로 이해했던 부분, 즉 ‘미국어’는 ‘영어’가 아니며 별개의 언어임을 기록한 사람이기도 하다.(p364-365)

    


코니 윌리스는 본인의 유명한 작품들에서 세인트폴 대성당이나 마블아치역 같은 영국의 건축물에 대한 애정을 과시하였기에 종종 영국 작가로 오해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내부 소행>을 읽으면 그가 미국 작가란 사실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국 작가라면 영매라는 소재를 이런 방식으로 사용하기는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영국 작가라면, 영매라는 소재를 이런 방식으로 사용하더라도 H.L. 멩켄이 아닌 데이비드 흄을 무덤에서 일으켜 세우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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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발: 멩켄의 대표작인 <편견집>은 국내에도 <멩켄의 편견집>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화재감시원>의 일부 독자들은 이미 이 책을 구매하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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